긴급조치법과 역사속으로
말레이시아가 정치적 탄압의 도구로 악용돼온 보안법과 긴급조치법을 51년 만에 폐지하기로 했다.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말레이시아 연방 성립 기념일을 하루 앞둔 15일 텔레비전 연설에서 “보안법의 완전한 폐지를 발표하게 돼 기쁘다”며 “이번 조처는 더 많은 시민적 자유와 인종화합을 보장하는 근대적이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또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해온 관련 법률과 제도도 국제적 기준에 맞춰 개정하기로 하는 등 일련의 개혁 조처를 내놨다.
보안법은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3년 뒤인 1960년에 식민통치 법률을 모태로 제정된 것으로, 영장없는 체포와 재판없는 구금을 허용해 정치적 반대자와 민주화 운동을 억누르는 대표적 악법으로 꼽혀왔다. 집권 통합말레이국민기구(UMNO)가 1957년부터 지금까지 54년간 장기집권을 유지한 비책이기도 했다. 말레이시아에선 16일 현재 보안법과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6000여명이 구금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라작 총리는 2008년 총선 때 연임에 도전하면서 보안법 ‘개정’을 약속했으나 이번에 전격 ‘폐지’를 선언했다. 야권은 “원칙적 환영”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의도’를 의심한다. 라작 총리가 5년 임기를 채우지 않고 이르면 내년에 조기총선을 시도할 것이란 관측도 퍼져 있다. 2008년 총선 때 집권당이 처음으로 안와르 이브라힘 전 부총리가 이끄는 야당연합에게 의석의 3분의 1 이상을 내어주는 최악의 성적을 낸 데다, 부패와 인종차별 정책으로 지지도가 급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모나시대학의 정치학자 제임스 친은 16일 <에이피>(AP) 통신에 “많은 사람들이 총리의 발표를 조기총선 준비용으로 본다”며 “집권당이 도시 지역 유권자들의 지지를 만회하려는 선거 전략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라작 총리는 현행 보안법을 폐지하는 대신 영장 체포주의와 재판없는 구금 기간 감축을 뼈대로 한 2개의 대체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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