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타이, 소수민족 최대 난민촌 맬라캠프를 가다
지난 1월 미얀마(버마)의 테인 세인 정권은 카렌민족연합(KNU)과 휴전에 합의하면서 63년을 끈 무력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버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가 참여하는 보궐선거가 4월로 예정되는 등 미얀마에는 ‘봄’이 바싹 다가온 듯 하다. 국경지대를 떠돌던 소수민족 난민 수십만명도 이젠 고향에 돌아갈 희망에 부풀어 있을까? 하지만 현실은 아이러니했다. 지난달 16~17일 방문한 타이-미얀마 국경지대 최대 난민수용소인 맬라 캠프의 사람들은 고향에 돌아가기보다 캠프에 머물거나 외국으로의 탈출을 꿈꾸고 있었다.
정부 탄압에 4만명 공동생활
‘임시시설’ 수십년 돌·철 못써
마치 1970년 서울 판자촌온듯 건기를 맞은 타이 농촌은 산불연기로 자욱했다. 타이 북방 국경도시 매솟 시내를 벗어난 픽업트럭이 한 시간쯤 달리자 연기에 잠긴 맬라 난민캠프가 나타났다. 임시 수용소라기보다는 오래 된 농촌마을 분위기였다. 나뭇잎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지붕 밑에 나무판자로 벽을 붙인 2층집 형태의 주택이 산비탈을 중심으로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대나무 울타리 위로 삐죽 머리를 내민 바나나나무가 아니었다면 1970년대 서울 변두리 판자촌을 떠올렸을 것이다. 마을 어디에도 벽돌이나 철판 같은 영구 구조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재생에너지 보급활동을 하는 시민운동가 살리니 타바라난은 “이 캠프는 어디까지나 임시 수용시설이기 때문에 타이 정부가 그런 시설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84년 문을 연 이 캠프엔 현재 약 4만명이 산다. 캠프 어디서나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노포세(57)의 768번 건물에는 여덟식구가 산다. 미얀마 농촌에 살던 그는 “정부군이 죽도록 일을 시켜 견딜 수가 없어 2009년 집과 땅을 버리고 이 캠프에 왔다”고 말했다. 그는 세 살짜리 손녀를 가리키며 “이 아이의 고향은 난민 캠프”라고 말했다.
미얀마는 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세계 최하 수준이다. 독립운동을 하는 변방 소수민족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다. 외국의 엔지오와 자원봉사자들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난민캠프는 역설적으로 이들에게 매력적인 곳이다. 미얀마 내부는 물론이고 다른 난민캠프에서도 맬라 캠프로 ‘유학’을 오는 학생이 수천명에 이른다. 매솟에서 유일하게 한국인이 운영하는 지원단체인 한·매솟 협력센터(대표 허춘중 목사)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미조 프로젝트 매니저는 “기약없는 타향살이를 하는 난민에게 자녀교육은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자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했다. 엔지오가 양질의 교육 제공
미얀마서 불법 이주 급증도
정부와 ‘독립투쟁’ 기약없어 캠프의 한 기술학교를 찾았다. 흙바닥에 놓인 낡은 책상과 어둑한 형광등 아래에서 학생들의 눈망울이 유난히 반짝였다. 에코 푸퍼(23)는 캠프에 소수력발전소를 설치하는 작업에 참여한 경험을 방문자에게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이 학교에선 3년 과정으로 16~30살 학생들에게 영어, 내연기관, 건축, 컴퓨터를 이용한 설계 등을 가르친다. 이런 기술학교가 맬라 캠프에 7곳이 있다. 미얀마에서 3년 전 왔다는 쿠오 텟 몽(16)은 “설계를 하는 공학자가 돼서 캠프 밖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캠프 안에서는 작은 텃밭 말고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일자리도 없다. 그런데도 마을엔 구멍가게가 있고 오토바이와 위성안테나까지 보인다. 난민들은 어디서 돈을 구할까. 매솟에서 활동하는 캐나다인 웬디 호는 “불법 이주민의 저임금을 착취하는 제조업이 매솟에 번창하고 있다”며 “이들의 임금은 월 1만5000바트(약 6만원) 정도로 세계 최저 수준”이라고 말했다. 난민 국제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타이 정부가 소수민족들의 난민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 이들이 정식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타이-미얀마 국경 지대 9개 난민 캠프 등록자는 모두 14만명이지만 실제론 더 많은 사람들이 미얀마를 떠나 국경지대에서 이주민촌을 이루고 있다. 실제 맬라 캠프에 거주하는 사람은 공식 통계의 2배인 8만명에 이른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방대한 유동 난민이 저임금 노동의 원천인 것이다. 휴전이 성립됐지만 북부 카친주에선 여전히 전투가 진행중이고, 휴전 당사자인 카렌민족연합도 “더 큰 자치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말자”고 외치고 있다. 현지인들도 대부분 “정부에 믿음이 안 간다. 더 지켜보자”고 말한다. 캠프에 식량과 일용품을 공급하는 국제 엔지오 단체 연대기구인 타이-버마 국경협의체(TBBC)는 2011년 연례보고서에서 “개혁개방 이후 정부군이 소수민족 군대를 해산해 국경경비부대에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분쟁이 오히려 격화된 측면이 있고 또 아시아 국가 등의 대규모 개발사업이 소수민족 지역에서 추진되면서 갈등이 심화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미얀마의 봄’은 아직 멀다. 매솟(타이)/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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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시설’ 수십년 돌·철 못써
마치 1970년 서울 판자촌온듯 건기를 맞은 타이 농촌은 산불연기로 자욱했다. 타이 북방 국경도시 매솟 시내를 벗어난 픽업트럭이 한 시간쯤 달리자 연기에 잠긴 맬라 난민캠프가 나타났다. 임시 수용소라기보다는 오래 된 농촌마을 분위기였다. 나뭇잎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지붕 밑에 나무판자로 벽을 붙인 2층집 형태의 주택이 산비탈을 중심으로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대나무 울타리 위로 삐죽 머리를 내민 바나나나무가 아니었다면 1970년대 서울 변두리 판자촌을 떠올렸을 것이다. 마을 어디에도 벽돌이나 철판 같은 영구 구조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재생에너지 보급활동을 하는 시민운동가 살리니 타바라난은 “이 캠프는 어디까지나 임시 수용시설이기 때문에 타이 정부가 그런 시설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84년 문을 연 이 캠프엔 현재 약 4만명이 산다. 캠프 어디서나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노포세(57)의 768번 건물에는 여덟식구가 산다. 미얀마 농촌에 살던 그는 “정부군이 죽도록 일을 시켜 견딜 수가 없어 2009년 집과 땅을 버리고 이 캠프에 왔다”고 말했다. 그는 세 살짜리 손녀를 가리키며 “이 아이의 고향은 난민 캠프”라고 말했다.
타이-미얀마 국경지대 난민캠프
미얀마는 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세계 최하 수준이다. 독립운동을 하는 변방 소수민족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다. 외국의 엔지오와 자원봉사자들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난민캠프는 역설적으로 이들에게 매력적인 곳이다. 미얀마 내부는 물론이고 다른 난민캠프에서도 맬라 캠프로 ‘유학’을 오는 학생이 수천명에 이른다. 매솟에서 유일하게 한국인이 운영하는 지원단체인 한·매솟 협력센터(대표 허춘중 목사)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미조 프로젝트 매니저는 “기약없는 타향살이를 하는 난민에게 자녀교육은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자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했다. 엔지오가 양질의 교육 제공
미얀마서 불법 이주 급증도
정부와 ‘독립투쟁’ 기약없어 캠프의 한 기술학교를 찾았다. 흙바닥에 놓인 낡은 책상과 어둑한 형광등 아래에서 학생들의 눈망울이 유난히 반짝였다. 에코 푸퍼(23)는 캠프에 소수력발전소를 설치하는 작업에 참여한 경험을 방문자에게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이 학교에선 3년 과정으로 16~30살 학생들에게 영어, 내연기관, 건축, 컴퓨터를 이용한 설계 등을 가르친다. 이런 기술학교가 맬라 캠프에 7곳이 있다. 미얀마에서 3년 전 왔다는 쿠오 텟 몽(16)은 “설계를 하는 공학자가 돼서 캠프 밖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캠프 안에서는 작은 텃밭 말고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일자리도 없다. 그런데도 마을엔 구멍가게가 있고 오토바이와 위성안테나까지 보인다. 난민들은 어디서 돈을 구할까. 매솟에서 활동하는 캐나다인 웬디 호는 “불법 이주민의 저임금을 착취하는 제조업이 매솟에 번창하고 있다”며 “이들의 임금은 월 1만5000바트(약 6만원) 정도로 세계 최저 수준”이라고 말했다. 난민 국제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타이 정부가 소수민족들의 난민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 이들이 정식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점을 악용하는 것이다. 타이-미얀마 국경 지대 9개 난민 캠프 등록자는 모두 14만명이지만 실제론 더 많은 사람들이 미얀마를 떠나 국경지대에서 이주민촌을 이루고 있다. 실제 맬라 캠프에 거주하는 사람은 공식 통계의 2배인 8만명에 이른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방대한 유동 난민이 저임금 노동의 원천인 것이다. 휴전이 성립됐지만 북부 카친주에선 여전히 전투가 진행중이고, 휴전 당사자인 카렌민족연합도 “더 큰 자치를 위한 투쟁을 멈추지 말자”고 외치고 있다. 현지인들도 대부분 “정부에 믿음이 안 간다. 더 지켜보자”고 말한다. 캠프에 식량과 일용품을 공급하는 국제 엔지오 단체 연대기구인 타이-버마 국경협의체(TBBC)는 2011년 연례보고서에서 “개혁개방 이후 정부군이 소수민족 군대를 해산해 국경경비부대에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분쟁이 오히려 격화된 측면이 있고 또 아시아 국가 등의 대규모 개발사업이 소수민족 지역에서 추진되면서 갈등이 심화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미얀마의 봄’은 아직 멀다. 매솟(타이)/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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