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하이옌’ 필리핀 중부 초토화
“호텔 지붕 통째로 날아갈 정도”
“수없이 많은 이들 물에 쓸려가”
생존자들, 참혹했던 순간 증언
정부 재해예방시스템 작동 안해
집 옷장 등에 숨은채 태풍 맞아
“호텔 지붕 통째로 날아갈 정도”
“수없이 많은 이들 물에 쓸려가”
생존자들, 참혹했던 순간 증언
정부 재해예방시스템 작동 안해
집 옷장 등에 숨은채 태풍 맞아
“거리는 쓰레기와 건물 잔해로 뒤덮인 강으로 변했고, 고인 물에 주검이 숱하게 둥둥 떠다니는 상황입니다.”
슈퍼태풍 하이옌이 필리핀 중부를 산산이 찢어발기고 물러간 직후인 9일(현지시각) 피해 지역을 둘러본 필리핀 적십자사 요원들은 <비비시>(BBC)에 현지의 참상을 이렇게 전했다. 지난 8일 새벽 4시40분께 필리핀 중부 비사야 제도의 레이테섬과 사마르섬에 상륙해 이틀에 걸쳐 인근 지역을 초토화시킨 하이옌이 남긴 상처는 참혹하다. 레이테섬 주도이자 최대 피해지역인 인구 20만명의 해안도시 타클로반에 파견된 적십자사 요원들은 “주검들이 도로 곳곳에 널려 있고, 수습된 주검들은 교회마다 쌓여가고 있다”고 전했다. 필리핀 적십자사의 리처드 고든 대표는 “현재 생존자들을 돕는 데 집중하고 있긴 하지만 ‘많고도 많은 주검들’을 위한 주검 가방을 계속 공급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해안이나 공항 등 저지대에서는 수백구씩의 주검이 무더기로 쌓인 채 속속 발견되고 있다.
타클로반의 택시 운전기사인 샌디 토로토로(44)는 <에이피>(AP) 통신에 “집이 부서진 뒤 태풍을 피하려고 아내와 8살짜리 딸과 함께 주차된 지프 안으로 숨었지만 차가 물에 쓸려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홍수로 물이 코코넛 나무 높이만큼 차오르기도 했다”며 “수많은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가며 손을 뻗어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필리핀 태생의 오스트레일리아인인 밀라 워드(53·여)는 구조용 군용기를 기다리면서 “공항으로 오는 길에 엄청나게 많은 주검을 봤다. 건물 잔해와 쓰레기에 뒤덮인 주검을 언뜻 본 것만 100구는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사망자가 레이테섬에서 1만명 이상이고, 타클로반시에서도 1만명이 넘는다는 현지 지방정부 관계자들의 추정이 나오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아직 피해 범위와 규모를 아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피해가 훨씬 커질 것으로 우려한다. 전기, 통신, 교통 인프라가 사실상 마비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필리핀 정부는 인구 400만명 이상이 태풍 피해 영향권에 들었다고 추정한다.
이처럼 막대한 피해가 난 데는 필리핀 당국의 무능도 한몫했다. 태풍 하이옌의 강력한 위력과 피해 가능성은 일찌감치 세계 기상기구들을 통해 예고됐다. 또 필리핀 정부는 태풍 예상 경로의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충분한 대피소와 비상식량 마련 등 재해예방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상황에서 현지 주민들은 무방비로 태풍을 맞았다. 생존자들은 “대부분 주민들이 집 옷장 속에 숨어 있었다”거나 “욕실에 숨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산발적으로 전해지는 구조 상황도 엉망이다. 현지 <알자지라> 통신원 자밀라 알린도간은 “태풍의 눈이 바로 머리 위를 지나갈 때 호텔에 갇혀 있었는데 건물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버렸다”며 “중상자들이 약도 음식도 물도 없이 거리를 헤매고 있으며, 병원 의사들은 전기도 촛불도 없는 암흑 속에서 부상자들을 맞고 있다”고 전했다. 이 지역에 가족을 둔 필리핀인들은 친지의 생사를 알 길 없어 발을 구르고 있다. 마닐라에 사는 택시 운전사 셰르윈 마르티나타(32)는 “타클로반에 어머니가 살고 계신데 태풍 상륙 몇시간 전에 통화했을 땐 괜찮았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겼다”며 “걱정 때문에 미칠 지경”이라고 말했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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