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태풍 하이옌의 최대 피해지역인 필리핀 중부 레이테주 주도 타클로반 공항 앞에서 주민들이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가려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물과 음식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민 수천명이 재난지역을 탈출하려고 공항으로 몰렸지만, 비행기에 오를 기회를 얻은 사람은 수백명에 그쳤다. 타클로반/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필리핀 최악 태풍피해 현장 르포] 정세라 특파원 2신
“필리핀 아내의 남동생 가족이 타클로반 공항 근처 3층집에 살았어요. 1~2층 사람들은 다 죽고 처남네 가족만 살아남았어요. 저지대인 공항 주변 산호세 지역에서만 1000명이 죽었다고 하네요.” 관제탑이고 여객터미널이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전히 진흙투성이인 기다란 활주로만 아니라면 이곳이 공항이라고 믿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12일 오후(현지시각) 필리핀 타클로반 공항에서 만난 한국 교민 사업가 신태후(52)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현지에서 영어캠프를 운영한다는 그는 공항을 기웃거리며 미군이나 정부 군용기가 가족의 탈출 기회를 마련해줄지 알아보는 한편, 동고동락하던 교민 소식을 들으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필리핀 정부가 통행금지령을 선포할 정도로 현지 치안 상황이 나쁘다. 한국인 교민들은 이따금 잠시 연결되는 이동통신에 의지해 타클로반을 탈출할 교통수단이 있는지 애를 끓이며 외부와 연락을 시도하고 있다. 선교사 가족이 주류인 교민들은 치안 문제로 교회나 집 등에 흩어져, 미리 확보해둔 물과 음식으로 버티다가 군용기가 뜬다는 소문이 돌면 공항으로 몰려나온다고 한다. 현지 필리핀 주민들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공항의 몰골을 잃어버린 타클로반 공항에는 어린아이를 안은 필리핀 부부부터 관광객 차림새를 한 백인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하염없이 줄을 서 있었다. 어린 조카와 언니, 부모님과 함께 이날 새벽부터 탈출 비행기가 뜨기를 기다렸다는 메리 마야(19)는 “아기가 있는 가족이 우선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 새벽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다”며 “식품도 물도 없어 어린 조카가 너무 힘들어하는데, 우린 한번도 식량 배급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날부터 필리핀항공은 재난지역 주민 응급철수를 위해 하루 2회씩 임시 항공편을 운행하기 시작했지만, 좌석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그나마 언제 중단될지 알 수 없다. 친정어머니와 어린 자녀 셋을 둔 타클로반 태생의 마즈미 빌라돌리드(40)는 “어른들은 굶고 아이들한테만 남은 식량을 쪼개 먹이고 있다”며 “어제부터 군용기가 뜨기를 기다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줄만 길어지고 있다”고 한탄했다. 치안 탓 여기저기 흩어진 상황
“군용기 뜬다는 소문 돌면 나와”
민항기 하루 2편 운항하지만
표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
시간 지날수록 줄 점점 길어져 필리핀 중부는 잇따른 재난으로 피해 복구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타클로반에 들어온 필리핀 적십자사 직원 히라 글리노고(27)는 “레이테주 인근 보홀도 최근 리히터 규모 7.2의 강진을 겪은데다, 이번에 태풍 하이옌 피해까지 겹쳤다”며 “여전히 지원이 필요한데도 레이테주 일대와 특히 타클로반의 피해가 워낙 심하다 보니, 물자나 관심이 이쪽으로만 쏠리고 있어 이중고를 겪을 판”이라고 말했다. 이날도 하이옌 재난지역 인근으로 중심부 최대풍속이 시속 55~75㎞에 이른 열대성 저기압 ‘소라이다’가 관통해, 응급구호 작업의 허브로 지정된 세부 공항에서 항공기 이착륙이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현지에는 한국 교민 안전을 확보하고 재난을 당한 필리핀 주민을 지원하려는 한국 외교부와 인도지원단체 선발대가 속속 도착하고 있다. 이날 오후 타클로반 공항엔 미군 수송기를 타고 박용증 마닐라 대사관 영사와 서울 외교부 본부 소속 신속대응팀 5명,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직원 5명, 중앙 119 구조본부 3명 등 19명이 도착했다. 이들은 선발대로 현지 상황 파악과 교민 지원에 나서는 한편,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교민들의 소재를 파악할 계획이다. 타클로반/정세라 기자 sera@hani.co.kr ▶ 자전거·두 발로 22시간 지옥 탈출…“곳곳에 주검·건물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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