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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아시아·태평양

탈옥 죄수들 무장하고 공무원들 탈출 행렬…‘설상가상’ 타클로반

등록 2013-11-13 19:47수정 2013-11-14 17:18

초대형 태풍 하이옌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필리핀 중부 타클로반이 위치한 레이테주와 인근 사마르섬을 잇는 연륙교 주변에서 13일 오전 교도소를 탈출한 죄수들과 정부군의 교전이 벌어지자 놀란 주민들이 급히 사마르섬 쪽으로 도망치고 있다.   타클로반/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초대형 태풍 하이옌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필리핀 중부 타클로반이 위치한 레이테주와 인근 사마르섬을 잇는 연륙교 주변에서 13일 오전 교도소를 탈출한 죄수들과 정부군의 교전이 벌어지자 놀란 주민들이 급히 사마르섬 쪽으로 도망치고 있다. 타클로반/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음식 찾아 곳곳서 시민들 공격
이재민도 정부 식량창고 약탈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13일 오전 10시15분(현지시각), 초대형 태풍 하이옌의 최대 피해 지역인 필리핀 레이테주 타클로반. 어린아이를 업은 필리핀 여성이 뛰기 시작했다. 삼륜차에 어린 딸을 비롯한 가족을 싣고 가던 한 남성은 레이테주와 사마르섬을 잇는 기나긴 연륙교를 향해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았다. 당황한 소녀가 하의만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달려나오며 울음을 터뜨렸다. 트럭과 오토바이들이 미친 듯이 가속페달을 밟으며 달아났다. 군인들은 초소에서 새로 탄창을 갈아끼우며 교전 준비를 서둘렀다.

태풍이 상륙했을 때 담장이 무너진 이곳 교도소에서 탈옥한 죄수들이 무장한 채 음식을 찾아 시민을 공격하며 폭동을 일으켜 현지 군인들과 교전이 시작된 것이다. 수감자들은 칼로 한 시민을 살해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클로반의 의사인 레지 아푸라(29)는 “타클로반 교도소에 600여명의 죄수가 있었는데 이번 태풍 때문에 그들이 풀려났고, 일부가 총칼로 무장한 채 도시 곳곳에서 음식을 찾아 시민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을 보고 타클로반으로 돌아가던 길에, 사람들이 울부짖고 도망 나오는 모습을 보곤 되돌아 나왔다”며 한숨을 쉬었다. 주민 로레나 가바나는 “오전 9시쯤 폭동이 일어났다”며 “그들은 음식을 원한다. 죄수들이 이곳 반군세력과 결합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곳 군경은 죄수들과 교전이 있었다는 소문을 부인했다.

굶주림에 지친 이재민 수천명이 정부의 식량창고를 털려다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타클로반 북부에 있는 알랑갈랑에서는 굶주린 생존자들이 12일 쌀이 보관된 창고로 몰려갔다가 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8명이 숨졌다고, 필리핀 국가식량국의 렉스 에스토페레스 대변인이 13일 밝혔다. 당시 창고 주변에는 군과 경찰이 배치돼 있었으나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속수무책이었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타클로반에서 구조본부 구실을 하고 있는 시청에서 만난 구조대원들도 상황이 험악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필리핀에서 활동해온 기아대책본부 소속 성봉환(59) 목사는 “현지인 선교사한테서 ‘감옥에서 탈출한 죄수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구조물자를 전달할 때 주의하고, 외국인은 쉽게 표적이 될 수 있으니 약간만 어둑해져도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들었다”고 말했다. 시청의 구조 관계자들 사이에선 11일 적십자 요원 한명이 구조활동 중 총에 맞아 숨졌다는 소문이 파다하지만, 아직 공식 발표는 없는 상황이다.

타클로반/정세라 김규원 기자 seraj@hani.co.kr

태풍 하이옌으로 최악의 피해를 당한 필리핀 타클로반에서 13일 오후 태풍으로 집을 잃은 한 주민이 임시주거지 앞에서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식수를 구해 가는 다른 주민을 바라보고 있다.  
 타클로반/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태풍 하이옌으로 최악의 피해를 당한 필리핀 타클로반에서 13일 오후 태풍으로 집을 잃은 한 주민이 임시주거지 앞에서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식수를 구해 가는 다른 주민을 바라보고 있다. 타클로반/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복구 나설 공무원마저 탈출행렬…구호작업 ‘마비’

뛰어다니는 아이들 곁 주검 썩어가
치안 부재속 구호품 전달도 어려워
굶주린 주민들, 정부식량창고 약탈
무너진 벽에 깔려 8명 죽기도
한국인 23명 여전히 ‘연락두절’

절망과 분노, 혼란과 폭력이 확산되는 이런 상황의 근저에는 너무나 참혹한 타클로반의 현실이 놓여 있다. 태풍의 직격탄을 맞은 지 엿새째, 타클로반은 말 그대로 주검의 도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다. 주검 수습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주검은 이미 시 당국이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일부나마 복구된 중앙도로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곁에는 널빤지 조각에 덮인 채 시커멓게 썩어가는 주검의 팔다리가 길가 곳곳에 삐죽 나와 있다. 가릴 널빤지조차 얻지 못한 주검은 다리를 굽히고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땡볕 아래 길 위에서 굳어가고 있다. 시 당국은 일부 신원 확인을 거쳐 집단 매장을 하고, 나머지는 검은색 주검가방에 넣거나 양탄자에 말아 길가에 쌓아둔다. 작업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필리핀 정부는 시내에 900여명의 군인을 배치했고, 장갑차와 군용트럭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치안 회복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저녁 8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도 시행한다. 하지만 행정력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필리핀 적십자사 관계자는 “시청 인력 가운데 20%도 채 복귀하지 않은 것 같다. 자기 가족의 안전을 챙기기에도 힘겨운 상황인데다, 피해를 당한 공무원도 많다”고 말했다.

실제 타클로반 공항에서 만난 시 공무원은 탈출 비행기 표를 구하려는 줄에 하염없이 서 있었다. 타클로반 시청 공무원 제프리 다가미(31)한테도 이번 태풍은 가혹했다. 공항 근처에서 살던 그는 지난 8일 새벽 5시께 태풍에 따른 해일로 엄청난 물이 집으로 밀려드는 것을 알아챘다. 급한 대로 배낭에 페트병을 채워넣어 구명조끼를 만들어 가족들에게 입혔다. 2층으로 긴급히 올라갔을 때 물이 밀어닥쳤고 한참을 그렇게 떠다닌 끝에 살아남았다. 그는 “근처에 살던 동생네 부부 집에 갔더니 어린 조카까지 넷이 모두 숨져 있었다”며 “집단 매장지에 동생 가족을 묻고 왔다”고 말했다. “탈출 항공권을 구하려고 새벽부터 공항에 계속 줄을 서 있다”는 그는 “가족을 세부로 보낸 뒤 청사로 복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적십자사와 세계 각국에서 온 지원인력들은 생존자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물자와 차량 부족, 치안 부재 등이 겹친데다 고립된 지역도 많아 걸림돌이 첩첩산중이다. 시 차원에선 적십자 직원들을 통해 가정마다 이틀에 한차례 쌀과 물 등을 전달하고 있지만, 이는 대체로 하루치를 넘기지 못한다는 게 구조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나마 고립 지역에선 이런 지원조차 받지 못한다.

현지 한국인 교민과 여행객들은 대부분 타클로반에선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지 골프장에서 전지훈련을 하던 변아무개(45)씨는 어렵게 가족과 연락을 취해 “고립돼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음식을 조달해 달라”는 구조 요청을 한국 외교부에 전달해오기도 했다.

한국 외교부는 13일 오전 현재까지 실종 신고가 접수된 한국인 55명의 생사 확인에 나서 이 가운데 32명이 무사한 사실을 확인했으나 23명은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라고 밝혔다. 주필리핀대사관 박용증 영사는 “타클로반 현지 교민들은 육로와 임시 항공편으로 대부분 현지를 탈출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14일 오전 군 수송기를 통해 구호물품을 보낼 예정이라고 13일 밝혔다. 구호 물품은 필리핀 정부가 요청한 담요와 텐트, 위생 필수품, 정수제, 비상 식량 등 20톤 규모다. 정부는 15일에도 같은 수송기 2대로 긴급구호팀 40명과 구호물품 10톤을 보낼 예정이다. 현재 타클로반 지역에는 12일부터 외교부의 신속대응팀과 긴급구호대 선발대가 들어가 활동하고 있다. 타클로반/정세라 김규원 기자 seraj@hani.co.kr

▷ 화보 더보기: ‘하이옌’이 할퀸 현장…필리핀 구호 절실

▷ 기사 더보기: 14년차 구조대원도 “내가 본 재난현장 중 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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