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 현신 김. 사진 올리비아 현신 김 제공
깜깜했던 무대가 서서히 밝아진다. 굴곡지고 희끗희끗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여성이 모로 누워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 잉글리시 시어터에서 열린 공연 ‘옐로우 바나나’를 보러 온 관객이 처음 마주하는 장면이다. 나체의 여성은 10여분 동안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 그가 사람이 아닌 ‘동물’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는 무대에서 동물처럼 바닥을 기고, 핥고, 넘어지고, 소리를 지르고, 몸을 떨기를 반복한다.
“백인이 아닌 인종을 동물과 가깝게 본 그런 슬픈 역사가 있어요. 마치 미국이나 유럽 나라들이 아시아 국가를 식민지화했을 때 ‘전시용 성’에 사람을 가두고 춤추도록 한 전시의 전통이죠. 무대에서 그런 역사를 관객들과 함께 성찰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공연을 직접 기획·연출하고 연기까지 한 올리비아 현신 김(35)씨는 다소 파격적인 첫 장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옐로우 바나나’는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곧 겉모습은 황인종이지만 사실은 백인 사회에서 자란 2세들을 의미한다.
<한겨레>는 지난 4일(현지시각) 베를린의 한 카페에서 김씨를 다시 만났다. 그는 현재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안무가 겸 큐레이터다. 2019년 그가 연출한 ‘미스 옐로우와 나 - 나도 뮤지컬이 되고파’는 아마데우 안토니오 예술상을 받았다. 독일 브란덴부르크주의 에베르스발데시와 재단이 인종차별을 비롯해 여러 형태의 차별, 인권과 다양성을 주장한 우수 작품에 주는 상이다. ‘옐로우 바나나’는 그 후속작이다. 이 작품은 베를린 유명 공연예술 극장인 소피엔젤레와 헤펠암우퍼를 비롯한 다수의 유럽 극장과 서울 아트선재센터 등 무대에 올랐다.
<옐로우 바나나> 공연에서 올리비아 현신 김. 사진 올리비아 현신 김 제공
공연에서 김씨는 내레이터로서 바나나의 기원부터, 인종으로 사람을 구별한 역사에 관해 설명한다. “태초의 바나나는 5000년 전 인도네시아·파푸아뉴기니에서 태어났다. 이후 동·서아프리카, 카리브해, 남아메리카 등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역사 속에서 ‘백인은 기독교’인, 흑인은 ‘아직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이분법적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스웨덴 식물학자 칼 폰 린네가 유러피안은 백색, 아프리칸 흑색, 아메리칸 빨간색, 그리고 아시안은 노란색으로 구분했다” 등의 내용이다. 김씨는 이에 대해 “과학적 인종차별의 시작이 아니냐”며 “인종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만들어진 것이다. 인종의 구분은 항상 변해왔다”고 설명했다.
그가 이러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그의 삶 그 자체’였다. 그는 1987년 독일 서부 쾰른과 가까운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만 10살에 김나지움(독일 중등 교육기관)에 올라갔을 때, 처음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13학년까지 있는 학교에서 유색인종은 단 4명뿐이었다. ‘나는 왜 금발에 파란 눈이 아니지?’ 이런 생각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 독일어 문법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을 때, 교사는 다른 독일 학생만 칭찬했다.
열두 살 무렵 비자 문제로 추방 당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경기도 평촌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6년 서울대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했다. 부모님 반대로 일단 공부했지만, 연기의 꿈을 놓을 수 없었다. 이태원 해방촌에서 외국 친구들과 함께 공연하던 그는 베를린에서 온 한 배우의 햄릿 연기를 보고 결심했다. 베를린으로 가겠다고. 23살이었다.
국립예술대에 들어가기 위한 오디션을 볼 때 다시 한 번 ‘인종’이란 벽에 부딪혔다. 만 23살까지 지원할 수 있지만 실제 ‘나이 먹은’ 여성을 뽑는 경우도 드물었다. “우린 널 뽑을 수 없어.” 어떤 이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공연 오디션을 볼 때마다 현지 관계자들은 다른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독일에서 태어나 12년을 살았는데, 나더러 ‘독어를 어디서 배웠냐, 왜 이렇게 잘하느냐고’만 하더라고요. 어떤 오디션이든 연기를 5초밖에 안 했는데 끊는 경우가 많았죠.”
역할을 맡아도 서양인들은 김씨에게 ‘아시아적’ 역할을 주로 기대했다. “백인 남성의 시각으로 보는 동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이 너무 싫어요. 성적으로 어필하거나, 순종적이거나. 아시아 여성 배우는 영어도, 독어도 못 하는 매춘부 역할이나 중국 요리를 하는 역할을 맡아요. 옷도 백인 남성의 욕구에 맞게 차려입죠. 근데 첫 장면부터 죽어요.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양 사람들이 가진 편견을 깨기란 쉽지 않았다. “전략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예 편견 안으로 들어가 보자고.” 스스로 작품을 만들고 싶어 연출·연기 분야로 명성이 높은 기센대에 입학했다. 안무와 미학 석사 과정을 거친 경험은 ‘옐로우 바나나’ 등 작품을 연출·연기하는 데에 자양분이 됐다.
“유럽과 아시아가 ‘유라시아’를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합니다. 글쎄, 제 개인적인 경우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경우에도 우리가 추방당할 일은 없었을 겁니다.” 김씨는 공연에서 관객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서 2억5000만년의 역사를 가진 유라시아 대륙을 위해 “잔치를 하자!” 외친다. 베를린 현지에서 활동하는 사물놀이패가 등장하고, 김씨는 관객들이 무대로 나와 함께 춤을 추도록 유도한다. 그는 “생각과 실천은 다르다”며 “언어로만 인종차별에 대해 말하면 통하지 않는다.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김씨는 공연과 더불어 인종차별 반대, 여성주의 관련 활동을 한다. 문화·미디어·정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가진 이주민 2세가 중심이 된 베를린 현지 조직 코리엔테이션에도 소속돼 있다.
“오늘 저는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진짜 바나나로 여기 이렇게 서 있습니다. 나의 몸은 항상 이질적이고, 위험하고, 일시적으로만 허용되고, 감염성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옐로우 바나나’인 김씨의 공연 속 대사는 최근 코로나19 확산 뒤 아시아인들이 서구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도 떠오르게 한다. 김씨는 “관객들이 공연을 마친 뒤 찾아와서 울곤 한다”며 “인종, 성적 정체성 등 여러 종류의 차별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베를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