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대혁명 당시 "빵을 달라"는 굶주린 민중의 함성에 "빵 대신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했다는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발언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영국의 역사학자가 주장했다.
리즈 대학의 강사인 사이먼 버로우즈 박사는 내달 30일 발간 예정인 신간 '위협, 스캔들, 혁명'이라는 책에서 앙투아네트 왕비의 이 악명높은 발언의 진원지는 앙투아네트의 입이 아니라 런던의 교활한 범죄인 일당이라는 새 주장을 펴고 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 신문이 29일 보도했다.
버로우즈 박사는 프랑스 왕가를 공갈 협박했던 런던의 범인 일당이 앙투아네트 왕비에 대한 나쁜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런던의 범인 일당은 앙투아네트 왕비의 비행을 적은 전단을 인쇄해서 프랑스에서 유포하겠다고 프랑스 왕실을 위협했다. 이 위협에 넘어간 루이 16세는 이 전단들을 파기하는 대가로 범인 일당에게 돈을 지불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의 한 성실한 관리가 바스티유에서 이 사본을 서류철에 보관해 두었고,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프랑스 군중의 손에 떨어진 이 전단은 수만장이 복사돼 프랑스혁명에 불길을 더했다는 것이다.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파산 위기에도 불구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비판을 받았고,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와 결탁해 혁명을 진압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의혹을 샀기 때문에 문제의 전단은 확실한 출구를 찾았고, 그 소문이 지금까지 쭉 전해 내려왔다고 버로우즈는 말했다.
버로우즈 박사의 의견은 앙투아네트 왕비의 성적인 타락, 과도한 사치, 어리석은 행동이 프랑스대혁명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지금까지 주장들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버로우즈는 프랑스와 영국의 첩보요원과 세관, 혁명 세력이 남긴 자료들을 샅샅이 뒤져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는 "당시 그들 사이에 '왕비의 비행에 대한 전단을 본 적이 있느냐'고 말하는 편지들이 오갔다. 그들은 이 전단을 찾아내는데 필사적이었다"고 말했다. 프랑스 왕실의 돈과 유능한 비밀첩보 요원의 힘으로 문제의 전단들은 모두 수거됐고, 런던의 범인 일당도 단두대보다는 돈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버로우즈는 주장했다. "범인 일당은 자신의 작업을 공개적으로 떠벌리는 것보다 침묵하는 대신 루이 16세 정부에 돈을 받고 파는 편을 더 좋아했다"고 버로우즈는 말했다. 적어도 1789년 바스티유 감옥 함락 전까지 프랑스 왕실과 범인 일당의 계약은 유효했다는 게 버로우즈 박사의 의견이다. 그는 스펠링의 오류와 똑같은 오류를 복제한 인쇄본들로 볼 때 1789년 이후 대량 유포된 전단들이 바스티유 전단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설명했다. 앙투아네트 왕비를 모함하는 비방 시리즈는 왕비가 아들인 왕자를 성적으로 유린했다는 주장에서 최고 정점에 이르렀다고 버로우즈는 지적했다.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빈에서 출생, 14세 때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됐다. 그러나 비운의 왕비 앙투아네트는 왕정의 부패에 항의해 프랑스 민중이 들고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의 와중에서 1793년 루이 16세와 함께 단두대에서 비극적 최후를 마쳤다. 김진형 특파원 kjh@yna.co.kr (런던=연합뉴스)
그는 "당시 그들 사이에 '왕비의 비행에 대한 전단을 본 적이 있느냐'고 말하는 편지들이 오갔다. 그들은 이 전단을 찾아내는데 필사적이었다"고 말했다. 프랑스 왕실의 돈과 유능한 비밀첩보 요원의 힘으로 문제의 전단들은 모두 수거됐고, 런던의 범인 일당도 단두대보다는 돈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버로우즈는 주장했다. "범인 일당은 자신의 작업을 공개적으로 떠벌리는 것보다 침묵하는 대신 루이 16세 정부에 돈을 받고 파는 편을 더 좋아했다"고 버로우즈는 말했다. 적어도 1789년 바스티유 감옥 함락 전까지 프랑스 왕실과 범인 일당의 계약은 유효했다는 게 버로우즈 박사의 의견이다. 그는 스펠링의 오류와 똑같은 오류를 복제한 인쇄본들로 볼 때 1789년 이후 대량 유포된 전단들이 바스티유 전단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설명했다. 앙투아네트 왕비를 모함하는 비방 시리즈는 왕비가 아들인 왕자를 성적으로 유린했다는 주장에서 최고 정점에 이르렀다고 버로우즈는 지적했다.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빈에서 출생, 14세 때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됐다. 그러나 비운의 왕비 앙투아네트는 왕정의 부패에 항의해 프랑스 민중이 들고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의 와중에서 1793년 루이 16세와 함께 단두대에서 비극적 최후를 마쳤다. 김진형 특파원 kjh@yna.co.kr (런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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