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가 로버트 스콧(가운데)과 동료들.south-pole.com
1912년 남극에 갔다 돌아오지 못한 비운의 탐험가 로버트 팰콘 스콧(Robert Falcon Scott)이 죽기 직전 아내와 가족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홀로 될 나의 아내에게(To my widow)”가 세상에 공개됐다. 10일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부설 ‘스콧 극연구소’는 영국 탐험대의 남극 도달 95주년을 기념해 이 편지를 일반에 공개했다.
“여보, 지금 궁지에 빠져 있는데 도저히 헤어날 것 같지 않아...”로 시작되는 그의 편지는 1913년 그와 동료들의 주검과 함께 발견됐고 그 해 그의 탐험일기를 책으로 엮은 <스콧의 마지막 탐험> 속에 일부가 공개됐으나 그가 쓴 편지 전문이 일반에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케임브리지대학은 300통이 넘는 스콧의 편지 소장을 마무리지은 기념으로 이 편지를 공개했다.
그는 “서둘러 점심을 먹고 잠시 온기를 느끼는 차에 곧 닥칠 생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됐고 마땅히 자나 깨나 잊지 않고 있던 당신에게 먼저 쓴다”라고 시작한 뒤 “내게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줬으면 좋겠어”라고 썼다.
그의 편지는 그의 탐험대가 남극에 도달한 뒤 베이스캠프로 돌아가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며칠 동안 쓴 것으로 그가 편지를 쓸 당시 이미 동료 중 에드가 에반스와 로렌스 오우츠가 사망한 상태였다.
스콧은 아내 캐슬린에 대한 애정을 전한 뒤 3살 난 아들 피터를 생각하면서 정부가 잘 돌봐줄 것이라며 가족들의 장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신이 죽고 난 뒤 아내가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 새 인생을 살 수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스콧은 이어 아들 피터가 자연을 접하면서 성장하고 자연사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해줄 것과 신을 믿게 할 것을 당부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피터는 트리니티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뒤 저명한 조류학자로서 일생을 마치게 된다.
그의 편지는 1989년 사망한 아들 피터 스콧 경의 미망인이 '스콧 극 연구소'에 기증한 것이다. 이번에 공개되는 편지들 가운데는 당시 아들 피터가 끄적거린 메모도 포함돼 있다. 스콧 극연구소는 1월17일부터 이 편지를 대중에 공개한다.
스콧은 1904년 남극에서 660㎞ 지점까지 접근해 당시로서는 남극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기록을 세워 국가적 영웅이 됐다. 그는 7년 뒤 로알드 아문젠이 이끄는 노르웨이 탐험대보다 며칠 늦게 남극에 도달해 '첫 남극 도달'의 영예를 거머쥐지는 못했지만 당시 여러 나라들이 정책적으로 뛰어든 탐험의 시대를 장식한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다. 스콧 탐험대는 갖은 고통과 어려움 끝에 남극점에 도달했으나, 이미 남극점에는 스콧보다 뒤늦게 출발한 아문젠 탐험대가 꽂아놓은 노르웨이 국기와 스콧에게 보내는 편지가 남겨져 있는 상태였다. 총 5명으로 구성되었던 스콧 남극점 원정대는 극한의 추위와 굶주림, 탈진 속에서 한사람씩 죽어갔고, 스콧은 죽음의 순간까지 가족과 국민에게 보내는 많은 편지를 남겼다. 스콧의 인문주의적 취향과 탐험대의 위엄어린 생활은 남극점 최초도달 실패에도 불구하고 스콧탐험대가 영국민들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 스콧 남극탐험대의 영웅적 최후 또한 이후 오랫동안 화제가 되었다. 당시 동상에 걸린 자신의 발 때문에 일행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을 알고 탐험대 전체를 위험에 몰아넣을 수 없다고 판단한 대원 로렌스 오츠는 3월16일 텐트를 나서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며 “잠시 밖으로 나갔다오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I am just going out and may be sometime.)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스콧과 함께 남아 죽음을 기다리던 대원 바우어스와 윌슨은 3월말 최후까지 모르핀 투입을 거부한 채 극한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보급기지까지는 불과 11마일이 남아 있던 자리였다. 아문젠팀은 1911년 12월 21일, 스콧팀은 1912년 1월17일 각각 남극에 도달했다. 아래는 스콧이 아내와 가족들이 보낸 마지막 편지의 전문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연합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부설 ‘스코트 극연구소’가 영국 탐험대의 남극 도달 95주년을 기념해 공개한 편지.(AP=연합뉴스)
스콧은 1904년 남극에서 660㎞ 지점까지 접근해 당시로서는 남극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기록을 세워 국가적 영웅이 됐다. 그는 7년 뒤 로알드 아문젠이 이끄는 노르웨이 탐험대보다 며칠 늦게 남극에 도달해 '첫 남극 도달'의 영예를 거머쥐지는 못했지만 당시 여러 나라들이 정책적으로 뛰어든 탐험의 시대를 장식한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다. 스콧 탐험대는 갖은 고통과 어려움 끝에 남극점에 도달했으나, 이미 남극점에는 스콧보다 뒤늦게 출발한 아문젠 탐험대가 꽂아놓은 노르웨이 국기와 스콧에게 보내는 편지가 남겨져 있는 상태였다. 총 5명으로 구성되었던 스콧 남극점 원정대는 극한의 추위와 굶주림, 탈진 속에서 한사람씩 죽어갔고, 스콧은 죽음의 순간까지 가족과 국민에게 보내는 많은 편지를 남겼다. 스콧의 인문주의적 취향과 탐험대의 위엄어린 생활은 남극점 최초도달 실패에도 불구하고 스콧탐험대가 영국민들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 스콧 남극탐험대의 영웅적 최후 또한 이후 오랫동안 화제가 되었다. 당시 동상에 걸린 자신의 발 때문에 일행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을 알고 탐험대 전체를 위험에 몰아넣을 수 없다고 판단한 대원 로렌스 오츠는 3월16일 텐트를 나서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며 “잠시 밖으로 나갔다오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I am just going out and may be sometime.)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스콧과 함께 남아 죽음을 기다리던 대원 바우어스와 윌슨은 3월말 최후까지 모르핀 투입을 거부한 채 극한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보급기지까지는 불과 11마일이 남아 있던 자리였다. 아문젠팀은 1911년 12월 21일, 스콧팀은 1912년 1월17일 각각 남극에 도달했다. 아래는 스콧이 아내와 가족들이 보낸 마지막 편지의 전문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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