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오면, 전철에서 음악 연주를 해서 돈을 구걸하거나 간난아기를 업고 동정을 자아내는 연기적인 목소리로 돈을 구걸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여행객들에게는 하나의 호기심이 생기겠지만, 매일 되풀이되는 이러한 일에 이탈리아인들은 싫증이 나 있다. 그리고 거리를 걷다가 일단의 무리들이 여행객을 둘러싸고 돈을 구걸하는 성가심을 당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여행객을 둘러싸고 돈을 구걸하는 척하면서 그의 신경을 어지럽게 해서 지갑을 소매치기를 한다. 다소 정직한 이들은 쓰레기통을 뒤쳐서 버려진 음식이나 각 종의 중고품을 모아 개인적으로 사용하거나 팔거나 한다.
이들을 짚시라고 부른다. 이들에게 있어 구걸하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집에 정착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캠퍼(camper)용 차나 간단한 집을 지어서 그들끼리 모여 산다. 대부분은 다른 유럽 지역에서 건너온 이민 짚시들이라고 한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짚시들이 모여사는 캠프를 가끔가다 보게 된다. 이 지역은 항상 그들이 버린 더러운 쓰레기로 둘러싸여 있다.
겨울에도 닳아빠진 옷과와 양말을 신지 않은 어린애들, 늙어빠져 보이지만 단지 40살도 채 이르지 못한 여인들의 얼굴 모습, 거리에서 손을 뻗히고 구걸을 하면서 검은 천으로 얼굴을 숨기고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위협적인 말(전혀 알 수 없는 그들의 말로)을 주고, 물도 없고, 위생시설도 없는, 진흙과 쓰레기 더미의 캠프에 살고, 겨울에는 추워 죽을 위험과 널빤지와 욧잇으로 만든 비좁은 오두막집의 중간쯤에 설치된 구식 난로에 타 죽을 위험의 선택에서 삶을 산다. 공공기관에 가지 않고 전철이나 버스표를 사지 않고 무임 승차를 다반사로 하고, 이탈리아어로 말할려고 힘쓰지도 않고, 자식들을 구걸하도록 거리로 내보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도둑질하는 것으로 낙인찍여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소설과 영화에서 짚시는 바람과 같이 언제든지 떠나갈 수 있는 낭만적 자유의 상징으로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짚시들의 현실은 이것과 정반대이다. 짚시들은 클란으로서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고 그 부족을 떠나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한다. 결혼에 있어서 각 자의 선택에 의해 신랑, 신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부모들이 결정한, 때로는 얼굴조차도 보지 못한, 상대자와 마지 못해 결혼해야 하고 더욱이나 결혼 연령이 매우 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짚시라는 말은, 건드릴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athinganos’에서 유래한다. 이것은 산스크리트어 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 이들은 아리이(arii) 족과 파리아(paria)족 이전에 인디아를 점령한 드라비티케 (dravidiche) 부족들중의 하나였다. 짚시들은 다양한 명칭들로 불려지고 있다.
지따노(Gitano) 또는 찌가노(zigano)는 이집트에서 왔다 : 짚시들은 아랍족의 침입이후 이집트에서 탈출한 콥트(copt)족과 오랫동안 혼동해 왔다. 왜냐하면 이들은 도망쳐다니는 민족으로 항상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롬(Rom)은, 아담처럼 죄를 지은자를 말하고자 하지만, 또한 단순히 인간을 의미한다. 왕을 가진 중심 짚시 민족들이 자신들을 지명하는 말이다. 신띠(Sinti)는 더욱 순수 인도유럽적 기원의 용어이고 그 이름하에서 다른 짚시들은 그 자신의 민족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남비장이 (Calderas), 류트를 만드는 자(laudari, 일종의 악기), 말사육자 (lovara) 등으로서 각 자의 부족을 나타내었다. 보헤미안(Bohèmien )은, 비참함속에서, 자신의 예술 또는 자신들의 열정에 사는 이들의 동의로 변했다; 하지만 초기에 보헤미안은 짚시로 불려졌었고 보헤미아 왕의 칙령으로 짚시들에게 주위를 돌아다니고 자율적으로 법을 관장하는 자유를 주었다. 걷는자들(Camminanti)는 시칠리아에 사는 짚시들의 이름이다. 유랑자(Nomad)는 관료적이면서 경찰적 용어이고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명명되었다. 그들의 역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역사이다. 여기에 실은 기록은 그들이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을 관찰한 유럽인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950년 경 하마즈 이븐 하산 알 이스팔라니(Hamaz ibn Hasan-al-Isfalani)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왕 베흐람 괴르(Behrâm-Gör)는 그의 신하들의 복지를 많이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의 하루의 절반을 좋은 음악과 곁들여서 휴식·축제·마시는 것 그리고 오락에 헌신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의 왕국에는 음악가들이 적었고 비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신하들을 기쁘게 하게 만들기로 결정한 그 페르시아 왕은 인디아의 왕에게 바로 1만2천명의 조트(Zott)족을 보내도록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1011년에 시인 피르두시(Firdusi)는 그 이야기를 다시 썼다. 인디아에서 온 방랑하면서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은 조트라고 불리지 않고 루리(Luri)라고 불렀고, 약간 적은 만여명이었다고 기록했다. 페르시아왕은 그들 각자에게 수송아지, 당나귀 그리고 밀과 수 천개의 일의 부담을 주었다. 왕은 그들이 번 것으로 농지를 개간하기를 바랬고, 그래서 돈을 받지 않고 연주를 해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들은 곡식을 심는 대신에 모두 먹어버렸고 이렇게 해서 말년에, 다시 왕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탕진했고 얼굴들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래서 왕은 그들에게 방랑하면서 연주하면 살아가도록 선포했다고 한다. 기록된 역사에 따르면 짚시가 처음으로 유럽에 나타난 것은 1000년경으로 기록되고 있다. 롬(Rom), 신띠(Sinti), 깔레(Kalè), 만누쉬(Manush)의 첫 조상들이 박해를 피해 인디아에서 이동해왔다고 한다. 그들의 첫 정착은 1054년으로 그리스에 기록되고 있다. 1492년에 카톨릭 신자인 아라곤 왕의 박해로 모리(Mori)인들과 유태인들과 함께 스페인에서 내쫓겨졌다. 1554년에 영국과 스웨덴은 짚시들에 대한 사형을 법령화했다. 1682년에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짚시를 억압하는 공식 문서에 서명했다. 1758년에 계몽주의자들은 짚시들을 융화시키고자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Maria Teresa) 여왕은 동화법을 최종적으로 인준했다. 짚시 어린애들은 국가의 관리하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기 위해 짚시 가족들에게서 강제로 떼어지게 되었다. 1925년 스위스 정부는 짚시 민족의 정착을 강제화했다. 50여년 동안 적어도 629명의 짚시 어린애들이 그들의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져서 각 종의 권력 남용과, 성적 남용을 포함한, 폭력을 하는 영구 가족, 고아원, 정신병원 등에 보내졌다. 반면에 많은 짚시 여자들은 강제로 불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종 말살은 Pro Juventute 라는 조직단체에 의해 정부의 후원과 함께 진행되어졌다. 1940-45년 사이에 나찌에 의해 강제 수용소에서 500.000 명 이상이 말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기록된 문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전후 나찌 전범의 재판이 열렸던 노림베르그(Norimberg) 에 짚시들은 증인으로서 출석되지 못했다. 1979년 유럽 위원회는 각 정부에 짚시의 문화를 보호하도록 권고했다. 2005년 유럽 연합(EU)은 짚시는 유럽에서 가장 인종차별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노마디(Opera Nomadi)에서 2006년 9월에 갱신한 자료에 의하면 15만명의 짚시들이 이탈리아에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이 자료는 그리 확실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중 7만명은 이탈리아 국적을 가지고 있고, 8만명은 발칸 반도와 동유럽 국가에서 온 것으로 분석된다. 15만명 중 60%는 18살 이하의 나이를 가진 롬과 신티이고, 이들 중 2만명은 12살 이하의 나이를 가졌고 학교도 가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첫 롬과 신티는 1400년에 오토만 제국에서 빠져나와 이탈리아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1800년대에 이동이 있었고 1900년에 루마니아에서 짚시의 노예제를 폐지함으로서 다시 이동이 있었다. 1966년과 1992년에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동해왔다. 또한, 폴란드, 체코 공화국, 몰다비아, 헝가리에서 온 짚시들이 있고 최근에는 루마니아에서 짚시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이름들로 불려지고 있다. Romanès, Porrajmos, Kalderasha(이탈리아 짚시), Khorakhanè(이슬람 짚시), Dasikhonè(정통교 짚시)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들 자신에 대한 자부심, 운명으로서의 죄를 지은자, 선택으로서 다른 이들과 구별되고, 중세에서 부터 나찌즘과 코소보 등의 모든 박해을 넘어왔다. 짚시의 언어에서 “manghel을 한다”는 것은 구걸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애들은, 종종, 그들의 부모와 함께 구걸을 한다. 왜 놀지않고 학교에도 가지않는가? 낯선이들에게 그들의 진짜 이름조차도 알려주지 않는다. 과거에 대해 말할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죽은자들에게도 단 한가지만 묻는다. ‘잊어 먹혀지도록 놔두어라. 왜냐하면 남아있는 혹은 살아있는 자는, 기억에서 해방된, 영원한 현재에서 살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언어에 내일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박해를 받아오면서도 유럽 사회에 동화하지 않는 이유를 무엇일까? 다음 편에서 이것들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따노(Gitano) 또는 찌가노(zigano)는 이집트에서 왔다 : 짚시들은 아랍족의 침입이후 이집트에서 탈출한 콥트(copt)족과 오랫동안 혼동해 왔다. 왜냐하면 이들은 도망쳐다니는 민족으로 항상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롬(Rom)은, 아담처럼 죄를 지은자를 말하고자 하지만, 또한 단순히 인간을 의미한다. 왕을 가진 중심 짚시 민족들이 자신들을 지명하는 말이다. 신띠(Sinti)는 더욱 순수 인도유럽적 기원의 용어이고 그 이름하에서 다른 짚시들은 그 자신의 민족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남비장이 (Calderas), 류트를 만드는 자(laudari, 일종의 악기), 말사육자 (lovara) 등으로서 각 자의 부족을 나타내었다. 보헤미안(Bohèmien )은, 비참함속에서, 자신의 예술 또는 자신들의 열정에 사는 이들의 동의로 변했다; 하지만 초기에 보헤미안은 짚시로 불려졌었고 보헤미아 왕의 칙령으로 짚시들에게 주위를 돌아다니고 자율적으로 법을 관장하는 자유를 주었다. 걷는자들(Camminanti)는 시칠리아에 사는 짚시들의 이름이다. 유랑자(Nomad)는 관료적이면서 경찰적 용어이고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명명되었다. 그들의 역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역사이다. 여기에 실은 기록은 그들이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을 관찰한 유럽인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950년 경 하마즈 이븐 하산 알 이스팔라니(Hamaz ibn Hasan-al-Isfalani)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왕 베흐람 괴르(Behrâm-Gör)는 그의 신하들의 복지를 많이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의 하루의 절반을 좋은 음악과 곁들여서 휴식·축제·마시는 것 그리고 오락에 헌신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의 왕국에는 음악가들이 적었고 비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신하들을 기쁘게 하게 만들기로 결정한 그 페르시아 왕은 인디아의 왕에게 바로 1만2천명의 조트(Zott)족을 보내도록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1011년에 시인 피르두시(Firdusi)는 그 이야기를 다시 썼다. 인디아에서 온 방랑하면서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은 조트라고 불리지 않고 루리(Luri)라고 불렀고, 약간 적은 만여명이었다고 기록했다. 페르시아왕은 그들 각자에게 수송아지, 당나귀 그리고 밀과 수 천개의 일의 부담을 주었다. 왕은 그들이 번 것으로 농지를 개간하기를 바랬고, 그래서 돈을 받지 않고 연주를 해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들은 곡식을 심는 대신에 모두 먹어버렸고 이렇게 해서 말년에, 다시 왕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탕진했고 얼굴들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래서 왕은 그들에게 방랑하면서 연주하면 살아가도록 선포했다고 한다. 기록된 역사에 따르면 짚시가 처음으로 유럽에 나타난 것은 1000년경으로 기록되고 있다. 롬(Rom), 신띠(Sinti), 깔레(Kalè), 만누쉬(Manush)의 첫 조상들이 박해를 피해 인디아에서 이동해왔다고 한다. 그들의 첫 정착은 1054년으로 그리스에 기록되고 있다. 1492년에 카톨릭 신자인 아라곤 왕의 박해로 모리(Mori)인들과 유태인들과 함께 스페인에서 내쫓겨졌다. 1554년에 영국과 스웨덴은 짚시들에 대한 사형을 법령화했다. 1682년에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짚시를 억압하는 공식 문서에 서명했다. 1758년에 계몽주의자들은 짚시들을 융화시키고자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Maria Teresa) 여왕은 동화법을 최종적으로 인준했다. 짚시 어린애들은 국가의 관리하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기 위해 짚시 가족들에게서 강제로 떼어지게 되었다. 1925년 스위스 정부는 짚시 민족의 정착을 강제화했다. 50여년 동안 적어도 629명의 짚시 어린애들이 그들의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져서 각 종의 권력 남용과, 성적 남용을 포함한, 폭력을 하는 영구 가족, 고아원, 정신병원 등에 보내졌다. 반면에 많은 짚시 여자들은 강제로 불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종 말살은 Pro Juventute 라는 조직단체에 의해 정부의 후원과 함께 진행되어졌다. 1940-45년 사이에 나찌에 의해 강제 수용소에서 500.000 명 이상이 말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기록된 문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전후 나찌 전범의 재판이 열렸던 노림베르그(Norimberg) 에 짚시들은 증인으로서 출석되지 못했다. 1979년 유럽 위원회는 각 정부에 짚시의 문화를 보호하도록 권고했다. 2005년 유럽 연합(EU)은 짚시는 유럽에서 가장 인종차별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노마디(Opera Nomadi)에서 2006년 9월에 갱신한 자료에 의하면 15만명의 짚시들이 이탈리아에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이 자료는 그리 확실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중 7만명은 이탈리아 국적을 가지고 있고, 8만명은 발칸 반도와 동유럽 국가에서 온 것으로 분석된다. 15만명 중 60%는 18살 이하의 나이를 가진 롬과 신티이고, 이들 중 2만명은 12살 이하의 나이를 가졌고 학교도 가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첫 롬과 신티는 1400년에 오토만 제국에서 빠져나와 이탈리아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1800년대에 이동이 있었고 1900년에 루마니아에서 짚시의 노예제를 폐지함으로서 다시 이동이 있었다. 1966년과 1992년에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동해왔다. 또한, 폴란드, 체코 공화국, 몰다비아, 헝가리에서 온 짚시들이 있고 최근에는 루마니아에서 짚시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이름들로 불려지고 있다. Romanès, Porrajmos, Kalderasha(이탈리아 짚시), Khorakhanè(이슬람 짚시), Dasikhonè(정통교 짚시)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들 자신에 대한 자부심, 운명으로서의 죄를 지은자, 선택으로서 다른 이들과 구별되고, 중세에서 부터 나찌즘과 코소보 등의 모든 박해을 넘어왔다. 짚시의 언어에서 “manghel을 한다”는 것은 구걸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애들은, 종종, 그들의 부모와 함께 구걸을 한다. 왜 놀지않고 학교에도 가지않는가? 낯선이들에게 그들의 진짜 이름조차도 알려주지 않는다. 과거에 대해 말할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죽은자들에게도 단 한가지만 묻는다. ‘잊어 먹혀지도록 놔두어라. 왜냐하면 남아있는 혹은 살아있는 자는, 기억에서 해방된, 영원한 현재에서 살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언어에 내일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박해를 받아오면서도 유럽 사회에 동화하지 않는 이유를 무엇일까? 다음 편에서 이것들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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