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실업률·불황 지속되자 강행
유럽연합 헌법 찬·반 투표 변수로 프랑스에서 주 35시간 노동시간제 완화 법안이 22일 의회를 통과했다. 이날 하원은 찬성 350 대 반대 135로 법안을 승인했다. 법안 상정을 앞두고 지난 10일에는 노동자 수십만명이 반대시위를 벌이는 등 사회적으로 진통을 겪었지만, 날로 늘어만 가는 실업률 앞에서 노동계의 저항은 역부족이었다. 애초 1998년 사회당 정부는 1인당 노동시간을 줄여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자며 주 35시간제 법안을 도입했고, 법안은 2000년부터 단계적으로 각 사업장에 적용됐다. 하지만 시행 5년을 지나면서 기대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 경쟁력만 떨어뜨렸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긴 했지만, 불만에 찬 여론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정년퇴직 나이 연장, 각종 사회보장 혜택 축소, 민간 연금 확대 등 최근 우파 정부가 잇따라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정책 도입과 맞물려, 이번 법안 통과로 더욱 나빠진 여론은 5월 치러질 유럽연합 헌법 찬반 투표를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간 〈르 피가로〉의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 52%가 “다음 주에 투표가 실시된다면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대답해 우려가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 주당 최대 48시간 노동=중도우파 세력이 주축인 하원은 주당 근무시간을 13시간까지 초과할 수 있도록 했다. 거대 공기업은 35시간제를 유지하되, 민간영역은 노동자와 합의하면 법정 노동시간인 주당 35시간 외에 추가로 13시간까지 늘릴 수 있게 돼, 주당 노동시간이 유럽연합 허용 최대치인 48시간까지 늘고, 연간으로는 220시간까지 늘어난다. 노동자는 더 일한 만큼 보수나 휴가를 더 받을 수 있고, 휴가를 모아 직업훈련이나 조기 은퇴에 활용할 수 있다. 장 피에르 라파랭 총리는 “이런 조처들은 프랑스 노동윤리를 회복하고 침체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한 것”이라며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 법안 통과 배경=정부가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법안을 강행한 것은 35시간 노동제 도입 뒤 오히려 실업률이 높아지고 경제성장률도 떨어지는 등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실업률이 10%대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인구 고령화로 연금제도와 건강보험 등에 부담이 가중돼 재정적자 수준이 유럽연합 회원국 기준인 국내총생산 대비 3%에 맞추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민간기업들은 노동시간 제한으로 인력운용에 효율성이 떨어져 결국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최근에는 구직자와 저임금 공장노동자들 사이에 35시간제 폐지에 동의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에이피통신〉은 “가난한 가정이나 한부모 가정은 노동시간 축소로 가계수입이 줄어 생활이 더 어려워졌다”며 “이들은 더 많이 일해 더 많은 돈을 받길 바란다”고 22일 보도했다. 또 이들은 기업주가 임금이 싸고 각종 규제도 덜한 동유럽으로 공장을 이전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난달 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한 여론조사에서 46%가 35시간제 폐지에 찬성, 43%가 반대했다. 김승택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프랑스는 노동시장 유연성이 높아 거시경제 상황에 따라 실업률이 크게 늘거나 줄 수 있는 나라”라면서 “35시간제는 인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기업활동에 방해가 될 수 있고, 이윤 발생이 줄면 추가 고용으로 연결이 안된다”며 이번 법안은 기업 인력운용에 유연성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 노동시장 유연화는 대세?=노동자의 목소리가 센 유럽에서 최근 노동시간을 늘리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말 독일 대표기업들인 폴크스바겐, 지멘스, 다임러크라이슬러 등의 노동자들은 고용을 보장받는 대신 노동시간 연장·유연화에 동의했다. 유럽연합이 임금이 싼 동유럽권으로 확대된 뒤 서유럽 노동자들이 전처럼 노동환경 개선을 계속 주장하다가는 일자리가 아예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 자료를 보면 지난해 25개 선진공업국 가운데, 프랑스 노동자는 연간 1431시간 일했고, 독일은 1446시간, 영국은 1673시간, 미국은 1792시간, 한국은 2390시간 일했다. 김균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서유럽 담당 전문연구원은 “노동생산성 면에서 노동시간이 더 긴 미국을 100으로 본다면 유럽은 80정도 밖에 안된다”며 “유럽은 미국을 상대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동시간 연장방안을 많이 논의하고 있어, 당분간 노동시장 유연화 움직임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진 기자 mind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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