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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블로그] 시삼촌의 재혼 파티에서

등록 2007-05-25 18:15

시삼촌한테서 이메일이 왔다. 수년 동안 동거하던 클라우디아랑 재혼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참석해 달라고. 그의 이름은 라이너. 아들 삼형제중 막내로 제일 멋쟁이다. 이제 60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임에도 늙어가는 티를 절대 안낸다. 내가 시삼촌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라고 하는 까닭은 조카며느리인 내가 보기에도 나름대로 남자로서 섹시하기 때문이다. 짐작하기에 썬스투디오에서 보기좋게 썬텐한 혈색좋은 얼굴에 늘 말쑥한 명품 정장, 반짝거리는 은색 BMW, 게다가 금상첨화로 다른 아들형제들에게는 없는 뮌헨대학 박사학위까지 그의 외모를 빛내준다.

그가 재혼한다는 클라우디아라는 여자가 어떤지도 보고 싶었고, 행동이 좀 방정맞다는 평을 들어왔던 그의 옛 마누라 페트라가 어떤 얼굴로 그의 재혼파티에 올까 하는 의문도 들었고. 무엇보다도 남의 일에 끼고 찡기고 하기를 좋아하는 내 성격 탓에 뮌헨행 뱅기 티켓을 예약했다. (그의 재력은 파티에 참가하는 모든 객들을 호텔 홀리데이 인에 재울 정도)

우선 뭘 입고갈까 망설였다. 걸칠 옷이 변변찮은 나로선 딱 두가지 선택 밖에 없었다. 결혼식 때 입었던 새색시 한복, 아니면 면접때나 장례식때 입었던 검정색 치마정장. 둘다 장단점이 있었다. 한복을 입을 경우 새색시용 한복이라 색감이 화려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로 파티복으로서 손색이 없을 수도 있겠으나 다른 한쪽으로 생각하면 자칫 혼자 생뚱맞은 분위기를 연출 할 수도 있겠다. 검정색 치마정장의 경우 좀 단촐하긴 하겠으나 튀지않고 깔끔해 보이겠다. 친척의 결혼식인 만큼남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난한 검정색 투피스 치마정장을 골랐다. 이 정장으로 말하자면 작년 동생 결혼식때 산 정장으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백화점 직원용으로 딱 떨어지는 스타일로 샀다. 장례식, 결혼식, 면접, 저녁식사용, 콘서트용 등 여러 용도로 입을 요량으로 샀는데 사실 파티용으론 조금 딱딱한 분위기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너무 튀어서 욕먹느니 무난한 걸 택했다.

파티는 저녁 7시에 시작했지만 예의상 7시반에 행사장에 도착했다. 우선 레스토랑 밖에 마련된 옷 맡기는 곳 앞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도착한 사람들과 얼굴도장을 20분간 찍었다. 신부측 사촌되는 산타닮은 할아버지가 우리랑 얘기하던 도중 우리가 신랑의 조카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래서 우리는 친척으로 맺어졌군요, 하며 부산하게 입을 놀렸다. 내 옆에 한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혼자와서 어쩔줄 모르며 앉아있어 말을 걸어볼까 하던 중 얼굴 도장 시간이 끝나고 손님들은 레스토랑으로 입장했다.

행사가 시작되는 음악이 울렸다.(음악을 담당하는 DJ가 따로 있었다)드디어 구김이라곤 한군데도 없는 줄세운 까만색 정장에 금색 넥타이를 맨 라이너, 분홍색 공단치마를 입은 클라우디아가 등장,미리 적어온 내용들을 읽으며 개회식을 알리고 참석한 80여명의 사람들을 무리별로 일일이 일으켜 세워 인사시키기 시작했다. 라이너가 남편의 대부인데다, 내가 유일한 아시아 사람이라 사람들의 눈길을 좀 받았었다. 하객대표로 라이너의 친구인듯한 사람의 인사말이 있었는데 오늘부로 신랑은 30년 동안 몸담아왔던 회사일을 청산하고 남부독일 어디 조용한 휴양지에서 집을 지어 남은 여생을 실업자(?)로 지낼 요량이라고 했다. 인삿말이 끝나자 마자 요한스트라우스의 왈츠에 맞춰 새신랑 신부가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웬 춤? 그것도 왈츠?

근데 사람들이 속속 앞으로 나가 왈츠를 추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 모두 어디서 저런 춤을 배웠을까 싶었다. 옆에 있는 어떤 아줌마한테 물어보니 학교댕길때 다 배웠단다. 그리고 요새는 문화강좌가 많아 남편 마누라 짝짝꿍이 되어 춤배우러 다니는 사람이 많단다.


헉!

춤추는 그들의 차림이 또한 심히 요란하다. 대부분 60이 다 되어가는 사람들일텐데 휘향찬란하게 차리고 온 것이다. 이브닝드레스에 긴 진주목걸이를 두개씩이나 건 여인, 무난한 까만 원피스에 빨간 꽃을 가슴에 단 여인, 그도저도 아니면 긴 반짝이 금박 목리로 포인트를 준 여인…. 나처럼 장례식 분위기를 연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 이럴줄 알았으면 목에 빨간색 스카프라도 하나 매고 오는건데….

입을 쩍 벌리고 촌년 장날에 구경나온듯이 구경하던 중 음악은 트위스트로 바뀌었고 라이너의 옛 마누라 페트라가 드디어 등장했다. 초콜렛색 바지정장에 큰 엉덩이를 이리저리 흔들며 트위스트를 추고있는 그녀의 반대편에 그녀의 애인이라는 남자가 보였다. 허름한 리바이스 청바지에 까만티셔츠, 쥐색 콤비자켓을 걸치고 춤을 추는 그 남자. 분위기는 면도기 선전하는 모델분위기로서 우리 엄마가 봤으면 기생 오래비라고 했을 지언정 절대 나이든 아저씨 티는 나지 않았다. 이 기회를 노칠새라 얼른 한컷 찍었다. 나도 파티분위기에 젖어 그의 삼촌, 사촌들과 짝을 바꿔가며 한바탕 춤을 추고 차려진 음식을 먹기도 하고 그렇게 잘 놀았다. 때때로 내 옆으로는 새로이 남매가 된 두 집안의 외동아들과 외동딸이 짝맞춰 춤추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날 파티는 새벽 3시까지 이어졌고 막판에는 나도 술낌에 자켓을 벗어던지고 막품을 좀 추었던 것 같다.

그 다음날 아침. 전날 술을 섞어마시는 바람에 얼굴이 숙취에 파리하게 삭았다. 내가 보기엔 삭아보이지만 나는 식사하는 무리들을 죽 둘러보니 그중에서 가장 젊은 축이었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마음먹은 것이 있다. 이제부터 무난한 건 좀 사절하자고. 이런 생각의 발상은 어떻게 보면 젊음의 끄트머리에 있는 이 나이에 이제 조금만 여운이 남은 내 젊음을 아쉬워하는 몸부름일 수도 있고, 젊음이 소중하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막 느끼기 시작한 늙음의 시작일 수도 있겠다. 꽃무늬 옷이 예뻐보이기 시작하는 나이가 늙어가는 징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요즘들어 꽃무늬와 빨간색이 예뻐보인다. 이유야 어찌됐건 난 이제부터 생일파티든 결혼파티든 장례식만 아니면 빨간색 치마를 입을 것이다. 거기다 꽃도 하나 달면 더 예쁠 것이고. 내 나이 이제 서른 여섯. 흰머리 쑥쑥 나기 시작하는 나이지만 나는 아직도 저들이 부러워하는, 저들보다 20년은 더 젊은 팽팽한 청춘 아닌가.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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