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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블로그] 어서, 집으로! 프랑스 파업날 일기

등록 2007-10-22 17:55

도로에 늘어선 자전거와 오토바이 행렬 ⓒ 한겨레 블로그 퓨전즈
도로에 늘어선 자전거와 오토바이 행렬 ⓒ 한겨레 블로그 퓨전즈
알려진 바와 같이 지난 목요일은 프랑스 총파업의 날이었다. 사르코지 새 정부의 국가 예산과 앞으로 변화하게 될 정책들이 골격을 잡아 발표되는 9월이 지나면 노동계는 10월에 반발한다. 10월에 치르게 되는 노동계 파업은 그래서 일종의 연중행사이다. 덕분에 교통수단이 대부분 마비되고, 이 날은 시민들이 오랜만에 걷기 운동을 하는 날이기도 하다. 만일 파리의 가을을 보고자 10월에 여행을 오시는 분들은 이 연중행사를 염두에 두시길….

그날 따라 급한 볼일이 있어서 나는 하루종일 이리저리 뛰고 엄청 걸어다녀야만 하였다. 버스와 지하철이 대부분 마비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언제 운행될 지 알 수 없는 교통 수단을 이용하면서 불편을 겪느니, 마침 가을 햇빛이 눈부신 날씨 아래 그냥 걸어다니는 편이 운동도 되니까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이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이용해 출퇴근을 하였다. 남편은 아들 녀석의 트로티넷(외발 롤러 스케이트 보드)를 가지고 출근했고 다행이 아들의 학교는 집 바로 옆이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걸어오는데 발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등이 굽어 지면서 구부정하게 걷게 되는 것이다. 도무지 오늘 하루 동안 몇시간을 걸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다리에 무리가 갔는지 힘이 서서히 빠지는데, 척추 관절증이 있는 나는 물리치료때 배운 호흡법으로 씩씩 거리면서 계속 걸음을 재촉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날은 택시도 합승을 하면 좋겠지만 원칙은 파업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교통이 마비되니 어렵게 빈 택시를 잡는다고 해도 계속 도로에 묶여 있어야만 했다.

아무래도 지름길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 들어선 골목이 ‘생 드니’가. 정신없이 걷고 있는데 스쳐가는 사람들 중에 왠지 분위기가 야릇한 여자들이 그 와중에도 눈에 띄였다. 아뿔사! 여기가 바로 거리의 여자들이 장사를 하고 있는 ‘생 드니’ 구나! 그녀들을 감시 하는 무섭게 생긴 포주 아저씨들의 매서운 눈길도 느껴지고, 이거 길 잘못 들었구나 하는데, 날이 날이니 만큼 평소에는 이 골목을 피하는 평범한 사람들,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도 우글거리며 열심히 걷고 있는 것을 보니 다소 마음이 놓였다. 게다가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빵빵한 몸매를 드러난 거리 여자들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부지런히 걷기만 하는 아이들과 엄마들, 샐러리맨들이 뒤섞여 특이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놓으려다가 포주 아저씨들의 눈매가 무서워 얼른 다시 걷기 운동에 전념.


도로에 늘어선 자전거와 오토바이 행렬 ⓒ 한겨레 블로그 퓨전즈
도로에 늘어선 자전거와 오토바이 행렬 ⓒ 한겨레 블로그 퓨전즈

마치 마라톤 경주에 참여한 기분이었다. 모두들 집으로, 어서 집으로!를 마음 속으로 외치는 듯 사람들이 우루루 같은 방향으로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나도 집으로, 어서 집으로!를 외치며 열심히 걸었다. 얼른 집으로 가서 다리 뻗고 푹 쉬고 싶은 마음이 정말이지 굴뚝에서 나는 연기보다 더 높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다리가 붕 뜨는 기분에 정신 없이 걸어가는 인파에 휩쓸여 동시에 둥실뜨면서 어느새 우리 동네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생각보다 일찍 우리 동네에 도착하자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집, 보금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워서, 그 집을 위해 뭔가 시장을 좀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동네 수퍼에서 감자 한 보따리를 사고, 며칠전 부터 사달라던 아들녀석의 칫솔도 하나 사들고 들어갔다.

집에 도착하니 아래층 사는 학생 꽃순이가 따뜻한 조명아래 아들 녀석 저녁밥을 벌써 해먹이고 있었다. 꽃순이의 이름은 ‘플로어’인데 나는 혼자 그녀를 마음 속으로 ‘꽃순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학생은 가끔 내가 아들의 하교를 맡을 수 없을때 아이를 학교에서 데리고 와서 잠시 돌봐주는 베이비 시터를 한다. 아들은 새

칫솔을 보고 좋아서 연방 뽀뽀를 날린다. 아, 이제야 집으로 들어온 실감이 났다.

꽃순이를 돌려 보낸 뒤 아들을 재우고 뜨거운 물에 불이 붙은 듯한 발을 담궈 족욕을 했다. 날씨가 화창했지만 추위가 예고되는 쌀쌀한 하루였다. 잠시 1995년도 총파업때를 회상했다. 그때 약 두달 동안 지속된 파업이 한창일때 겨울도 빨리 왔고, 2주동안 눈마저 펑펑 내렸었다. 파리에 눈이 그렇게 많이 온 적도 드물었다고 한다. 당시 파리에 도착한지 몇달 안된 나는 파리 근교에서 선배와 같이 아파트를 나누어 쓰고 있었고, 눈발이 내리는 가운데 시내에 있는 학교를 오토 스톱을 여러번 하면서 겨우 겨우 다녔다. 지금은 오토 스톱을 할 용기가 전혀 없지만 그땐 영화에서 본 것을 좀 따라 하고 싶은 호기도 있었고, 총 파업이라고 하더라도 학교는 정상적으로 수업을 하였으니 갓 입학한 학교를 빠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파업이 오래 갈 수록 힘이 들어서 나중엔 정상수업을 하는 학교가 원망스럽기 조차 했던 추억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족욕을 마치고 TV를 켜고 뉴스를 보았다. 사르코지와 아내 세실리아가 드디어 이혼을 공식 발표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이혼 수속은 최소 3개월은 잡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이혼이 전제된 조건 아래 엘리제궁에 나란히 손잡고 레드 카펫을 밟으며 다정하고 이상적인 부부상을 연출한 셈이다.

어쨌든 그들의 이혼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놀랍지도 않았고, 그나저나 파업은 오늘 목요일에 이어 금요일까지 지속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르코지는 얄밉게도 이혼 발표를 오늘 파업에 맞추어서 한다. 대중의 관심이 파업에 몰려 있으니까 이혼으로 인한 스캔들을 피하고자 하는 계산이 역력하다. 조사에 의하면 현직 대통령중 이혼한 사유가 딱 한건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대통령을 지냈던 Panpandréou.

남편이 아홉시가 넘어 집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걸었는지 얼굴에 땀이 줄줄 내리고 있었다. 겨울에 저렇게 땀을 많이 흘리면 감기 걸리기 쉬운데,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구부정하게 할미처럼 어기적 어기적 걸으며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편의 저녁상을 차린다. 마침 장조림을 해놓은 것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남편은 소리친다.

‘아, 드디어 집에 왔구나 ! 집에 오니 너무 좋다 !’

아무래도 등이 너무 아파서 전기 장판을 꺼냈다. 따뜻한 장판에 등을 지지면서 자면 내일 아침 온 몸이 쑤시거나 다리가 무겁진 않을 것 같았다. 장판 덕분에 따뜻하게 자고 일어난 그 다음날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걸어다닐 수 있었다. 역시 집이 최고다.

에필로그

파업은 미미하게나마 주말까지 이어졌다. 파업을 치루고 나면 오히려 도시 분위기는 더 좋아지는 느낌이다. 지하철 같은 경우 평상시 승객들의 분위기가 아주 무거운데 파업을 치루고 나면 사람들의 인상이 오히려 부드럽고 사랑스럽기 조차 하다. 또한 집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듯 정상운행되는 모든 것을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무엇 보다, 너도 나도 파업을 공유했던 그래서 결국 파업을 피부로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그러한 미세한 동질감이 파리 시내에 묘한 활력을 준다고나 할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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