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업가 출신의 인물이 정부의 수반이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와 경제의 성장에 주요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기업가 출신의 인물이 한 국가를 이끌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에 대한 가정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통계상으로 얼마나 많은 기업가 출신의 인물이 정부의 수반이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 글에서 이탈리아에서 2001년에서 2006년 사이 베를루스꼬니(Berlusconi)가 수상이 되어 이 나라를 이끈 사실을 이야기해 주고 싶다. 본인의 글을 접하는 독자라면 이탈리아의 현대 정치와 베를루스꼬니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라고 생각한다.
우선, 그의 출현의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60년대의 학생운동과 노동자 운동, 그리고 70년대의 테러리즘, 그리고 정치적 무능력, 92년의 딴제또뽈리는 이탈리아 정치에 공백을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건축업 분야의 활동을 시작했고, 68년에 밀란 2라는 위성도시가 건설될 예정인 밀란의 세그라떼 (Segrate)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돈으로 땅을 샀다.74년에 밀란2에 공동소유의 방송국을 만들었고 80년대에 까날레 5 (Canale 5)로 개명했다. 77년에 신문 ‘죠르날레(Il Giornale)’의 한 쿼터를 샀다. 80년대에 선전 회사를 건립했고, 82년에 이딸리아1를, 84년에 레떼꾸아뜨로(Rete4)를 쌌다. 하지만 이 레떼꾸아뜨로는 전국 방송을 할 수 없었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당의 정부는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 이 레떼꾸아뜨로의 전국 방송을 허락했다. 86년에 밀란 축구 클럽을 샀고, 프랑스·독일, 그리고 스페인에 방송국을 세웠다. 89년에 몬다또리(Mondatori)를 장악함으로서 책과 주간지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93년에 정치계에 들어섰다.
당의 결성. 포르짜 이딸리아당은 한 사람이 당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그의 홍보회사의 간부들을 이용했다. 조직도 없고, 토론도 없고, 무엇인가에 의존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프라스틱 정당이라고 분석되었다. 단지 수장(capo)만 있을 뿐이고, 그 수장은 다음과 같은 유일한 이유로서 베를루스꼬니였다 : 왜냐하면, 매스 미디어 (Tv채널들과 신문, 잡지사)와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그러므로 모두와, 선거 캠페인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불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포르짜 이딸리아당의 소위 말하는 당 간부의 어느 누구도 그에게 반발하거나 시위를 하도록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이 당의 구성원들은 1심 또는 3심에서 형을 선고받은 많은 사람들을, 딴제또폴리에 대해 앙심을 가진 이들, 그리고 그의 개인적 변호사들을 상원과 하원들에 포진시켰다. 2001년 5월에 한 시사 잡지는 포르짜 이딸리아당에 1심 또는 3심을 받은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를 그들의 이름과 함께 실었다. 적어도 21명이었고, 그 숫자는 최근의 반 정치 열풍을 일으킨 코메디언 벺뻬 그릴로(Beppe Grillo) 또한 명단을 발표했는데 거의 변화가 없었다. 또한 포르짜 이딸리아당은 여론의 동향에 따라 베를루스꼬니가 단독으로 결정한다. 베를루스꼬니가 없으면, 각 지역의 포르짜 이딸리아는 움직이지 않는다. 정치적 개혁, 새로운 지도 계급의 선택, 등 이 모든 것은 단지 베를루스꼬니의 결정에 달려있다.
매스 미디어. 마리오 로드리게즈(Mario Rodriguez), 빠도아(Padova) 대학의 정치 커뮤니케이션 교수, 는 베를루스꼬니는 프로퍼갠더(propganda)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그 중심은 TV였다고 말했다. 이것은 단지 변화의 원인만이 아니라, 그 결과에 있어서 양면가치적이었다. 관려된 사회는 이미 미디어의 사회이고, 그 사회는 TV의 힘(power)로 성장했고,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자의 힘은 커지게 되어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그것이 충첩되었다. 왜냐하면 TV적 지도자는 또한 정치 지도자로 크기 때문이다. 정치의 카테고리는 대표성에서 가시성로 변했다. 이것은 정치 지도자 계급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합의를 모으는 전통적 정치 능력보다는 TV 카메라를 잘 받는 능력에 더 근거를 두는 방향으로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3개 TV 채널을 소유하고 있으니, 상상하기에 충분하리라고 본다.
언론의 탄압. 2002년 4월에 베를루스꼬니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공식 방문중에 한 인터뷰에서 비아지(Biagi, 정치평론가), 산또로(Santoro, 정치 프로그램 진행자), 루따찌(Luttazzi, 풍자 코미디언)는 국민의 돈을 범죄적 목적으로 이용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 이상 그들이 TV에 출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국영 TV 간부의 의무라고 말했다. 2002년12월 이후, 세 사람은 국영 TV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루따찌와 비아지는 더 이상 계약을 얻지 못했고, 산또로는 덜 중요 시간대에 프로그램 진행을 제의 받았지만 그는 거부했다. 2003년 11월에 뉴요커(New Yorker)는 꼬르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 이탈리아 주요 일간지)의 디렉터였지만 인터뷰 며칠 전에 사임한 페르루쵸 데 보르또리(Ferruccio De Bortoli)를 인터뷰했다. 그는 너무나 심한 압박을 받았고, 사임을 하도록 강요되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97년 이후 현재까지(2003) 적법성(legality)의 수준은 낮아졌고, 블라인드 트러스트 (blind trust)는 없고, 수상의 이해의 충돌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정권은 뭇솔리니처럼 정치적 반대자를 섬으로 귀향보낼 필요가 없이, TV에서 더 이상 말을 하도록 하지 못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의 집권 기간에 이탈리안 매스미디어는 입을 다물었고, 외국의 신문들을 통해서만 이탈리아의 소식의 진실을 접할 수 있었다. 반면에 그와 라이트 정치인들은 안하무인적이면서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했다. 2006년 3월 TV의 한 정치 인터뷰 프로그램 (‘In mezzo’ora’)에서 시작된 지 몇 분만에 베를루스꼬니는 그 프로그램에서 가버렸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질문자에게 “이제 나에게 질문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지요”, “당신의 경력에 흠집으로 남을 것이다”라는 위협, 그리고 “부끄러워해”라고 하면서 그 프로그램을 져버렸다. 이러한 태도는 소위 말하는 라이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각 정치 대담 프로그램에서 말하고 싶은대로 혼자서 말하고, 레프트 정치인들이 말하는 사이에 끼어들거나 아니면 진행자가 그들에게 다소 불리한 질문을 하거나 끼어들면 가버리겠다고 위협하는 풍조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2005년 11월, 경제 장관 뜨레몬띠(Tremonti)는 한 TV방송의 프로그램에서 참여자와 진행자에게 위협과 모욕을 주고 가버렸다. 단지 한 경제 전문가를 초대했고, 예상하지 못한 질문들을 그에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TV를 그의 개인적 선전을 위해 이용했다. 부시의 목장에서의 베를루스꼬니의 모습을 방송, 재방송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세계 주요 지도자들과 거의 동등한 위치를 갖지 못하고, 단지 그 그룹에 끼이기를 바라는 그는 세계 지도자들과 농담하는 것을 이탈리아인들이 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사진사와 사진 기자들이 그의 사회적 승리를 도큐멘터리하기 위해 그와 함께 여행하도록 했다. 2005년 국민들은 더 이상 그가 말하는 꿈을 믿지 않았고, 놀림을 당했다는 느낌을 갖고 귀찮음과 분노로 반응한다. 하지만 베를루스꼬니는, 슬로건, 이미지, 매디어에 대한 통제, 이미 드러난 과거의 속임수로 현실의 인지를 바꾸고자 하는 희망속에서 계속에서 국민들과 접촉했다. 2006년 1월에 라이트의 한 주간지는 TV 에서 나타나는 레프트들의 가치들을 비난했다. 이것에 따르면, 레프트의 가치는 새로운 이탈리아(베를루스꼬니와 그의 당이 만들고 있는)의 열정을 증오, 시기하고 있고, 상업 TV는 그것들을 전복시키는 떠들석한 쾌락주의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말을 믿을 것이다. 상업 TV 소유자는 베를루스꼬니이다. 세개의 그의 TV 채널은 상업방송 규제 감독 기관(authority)가 규정한 기준을 넘어선 상업 선전과 선정적이고 누드적인 여자의 몸을 사용한 시청율 높이기를 하고 있다. 법 제정. 베를루스꼬니와 관련된 재판은 1993년부터 시작해서 2004년까지 12개 사건의 재판 과정이 있었고, 이중 5개의 사건만이 무죄 확정 판결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실토로 실비오 베를루스꼬니와 마르첼로 델루뜨리(Marcello Dell’Utri) 1992년 5월 23일 시칠리아의 빨레모(Palermo)의 까빠치(Capaci) 에서 시칠리아 마피아에 의한 검찰 죠반니 팔꼬네(Giovanni Falcone)와 그의 부인, 수행원들을 400 킬로의 폭발물로 살해한 사건으로 조사되었다. 이것은 한 마피아 개과자의 폭로로 돈의 리사이클과 위험한 빨레르모 마피아들과의 우정와 얽힌 조사를 받게 되었다. 92년과 93년 사이에 마피아 보스들이 찾고 있었던 “새로운 접촉자”로서 그들 두를 지적했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조사는 2002년 5월 3일에 확정적으로 끝냈지만, 그 끝이 분명하지가 않았다. 베를루스꼬니는그의 개인 변호사들을 상원으로 지명함으로서 그와 그의 측근에 관련된 범죄를 해소기위해 우선적으로 개인화된(ad personam) 법을 제정하는데 힘썼다. 예를 들면, 구 치리엘리(Cirielli) 법. 이 법은,항상 똑같은 작은 범죄를 반복하는, 이민자들, 마약 상용자들, 작은 범죄자들을 타격했고, 감옥을 수감자로 넘치게 했다. 반면에 그와 그와 측근들이 관련된, 중범 (부정)을 저지른 자들은 건드리지 않는 법이었다. 더우기나 베를루스꼬니는 공개적으로 검찰의 일을 하는 자들은 정신적으로 이상한 자들이라고 공격했다. 이해의 충돌(Conflict of interest)문제. 2001년에 다시 정부의 수상이 되었을 때 그의 이해의 충돌(conflict of interest) 문제를 100일 이내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에게 있어, 정치 권력의 목적을 위한 경제력의 비적절한 사용; 즉, 베를루스꼬니는 정부를 교란하기 위해 그의 매스미디어 기업인 메디아세트(Mediaset)를 사용하고, 동시에, 경제력의 강화의 목적을 위해 정치 권력의 비적절한 사용. 즉, 메디아세트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가 필요하다. 93년에 정치계에 들어섰고, 94년의 선거에서 다수의 투표를 얻어 정부의 수상이 되었지만, 6개월만에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많은 빚에 쌓여 있던 그의 메디아세트(Mediaset)는 그의 정부하에서 제정한 뜨레몬띠(Tremonti) 법 – 재투자한 기업의 자본에 대한 세금 감소 – 메디아세트는 수천만 리레 이상의 세금 감세의 선물을 얻게 되었다. 2001년에 재집권한 베를루스니꼬니는 축구 구제법, 가스파르리 법(Gasparri – 베를루스꼬니의 불법 전국 방영 채널을 유지시키는 법), 조건적인 세금 감소법등을 만들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수익을 얻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해의 충돌에 대한 그의 정부의 해결책은 수상은 결정 이전까지 사안을 주재하지만 결정의 순간에는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웃지 않을수 없는 논리였다. 이것을 만든 이는 현재 유럽연합(European Union)의 부의장이면서 이민자 문제 담당하고 있으니 유럽 연합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005년 12월에 국세청은 밀란의 검찰에 추정된 탈세자에 대한 사정을 끝내기 위해 조사 과정을 물었다. 여기에서 베를루스꼬니는 조건적인 세금 감소법에 따라1997년에서 2001사이에 1,500유로와 2002년 300유로, 전체 1,800 유로를 지불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법은 그의 정부가 2002년에 제정한 것이었고, 그는 결코 이 법을 그의 기업을 위해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했었다. 반민주적 행위들. 2005년 10월 국가 공문서 기록원들의 반발이라는 조그마한 기사가 실렸다. 그 시작은 수상 관저는 그의 공문서들을 더 이상 중앙 공문서에 더 이상 제출하지 않고, 그 자체내에서 보존한다는 의도를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각 수상들, 그리고 특히 베를루스꼬니,가 한 덜 투명한 정치 운영의 기록을 제거하거나 감출 위험성을 가질 수 있었다. 2007년 6월에 로마에서 포르짜 이딸리아당의 프라이머리가 있었다. 이것은 베를루스꼬니가 직접 지명하는 책임자(coordinator)를 뽑는 것이 아니라, 20여명의 부 책임자(vice-coordinator)를 뽑는 것이었다. 단지 명목상의 민주주의적인 대표자를 뽑는 프라이머리를 했다는 것을 정치선전화하기 위해 필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단지 형식상의 선전적 요식 행위였다. 그와 라이트는 말뿐인 경제상의 자유주의자들(liberalist)이다. 그에게 편리한 순간까지만 자유주의자이다. 정치적 교사로 산 특권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독점, 기업의 절대주의, 성공의 비도덕적 숭배를 옹호한다. 2001년의 선거 전에 TV 상에서 유명한 이탈리아인들과 약속을 서명하는 쇼를 했다. 펜션을 올려서 2 백만명의 국민을 가난에서 제거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학교, 병원, 과학, 환경에 투자를 하지 않았고, 그의 개인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안, 국가의 나머지 문제들은 미해결로 남겨 놓았다 2006년 6월에 베를루스꼬니 정부는 1,560만개의 새 직업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이미 2001년 중반에 이미 1백만명이 취업을 했다고 발표했다. 그 이후 5년 동안 그 결과는 거의 0%에 가까운 취업율를 가졌다. 왜냐하면 이 기간 (2001-2006)에 이탈리아 통계청 (Istat)에 따르면 80% 이상의 취업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전에 불법으로 일을 하고 있는 이민자들에게 노동허가증을 허락하는 특별법으로 약 650.000 명의 이민자들을 취업 통계상에 포함시키는 속임수를 이용해서, 실업율이 7% 수준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산업 생산 분야의 취업율은 감소되었고, 단지 서비스 분야 그리고 파타임분야에서만 취직율의 증가를 보였을 뿐이었다. 또한 펜셴비를 증가시켰다는 것 등을 주장하지만, 이탈리아 국민들의 소비는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감소되었다. 이 이유는 정부 초기에 리레에서 유로 바뀌는 과정에서 물가 통제를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마음대로 상인들이 물가를 정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이었다. 그 파급의 심각성을 감지했을 때는 정부는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도 없고, 단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변명은 시장의 자유주의에서 정부는 어떠한 개입도 할 수 없다는 말로서 그 여파의 책임을 딴 곳으로 돌리고자 했다. 트윈 타워 공격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프랑스등에서는 생산성이 꾸준히 증가했고, 각 정부들은 가격 통제를 통해 상대적으로 물가 안정을 취한 반면, 이탈리아의 생산성은 0%에 가깝게 감소했고, 정부 지출은 계속적으로 증가했다. 베를루스꼬니 정부의 변명은 트윈 타워의 여파와 중공의 저가격 물품의 공세라고 주장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취업율이 증가했고 펜셴비를 올렸다면, 왜 국민들의 소비는 전혀 증가하지 않았고, 가난함을 느끼게 되었는가? 베를루스꼬니와 그의 정부를 직접적인 대중적 동의에 근거한 개인적인 권위적 특징과 강한 개인적 특성를 가진 만장일치적 투표의 정치 체제인 마키아벨리적 보나파르트 모델의 정권이라고 분석했다. 그의 영향은 베를루스코니즘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추가시켰다. 베를루스코니즘이란 우선적으로, 공공 토론장에서의 소위 말하는 중도주의자 또는 온건주의자는 대화자의 말을 중단시키고,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화자에 반대 논리를 펴고 고집하고 반복하고, 그것에 확신을 주도록 한다는 것이다. 특히, 누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간단하고 상품 선전적 용어를 반복함으로서 국민들을 심취하게 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정치인들의 과다한 TV 출연과 정치적 토론보다는 농담과 비전문가들과의 담소로 시간을 보내고, 연예계의 여자들을 오피니언니스트로 출연시키며, 그들과 노래나 춤을 추도록하는 것이다. 새로운 용어로 인포테인먼트(infotainment)이다. 다시 말해서 인포메이션과 엔터테인먼트를 섞은 것이다. 세번째로, 비판은 ‘린치’로, 정보(information)는 ‘테러리즘에의 부추김 또는 선동’으로 악선전되었다 네번째로, 베를루스꼬니와 그의 연합당은 적들을 증오하고 악선전하면서, 그들은 적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지만, 레프트 당은 단지 증오하는 것만을 안다고 선전한다. 우리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고, 레프트들은 더 많이 가진 자들에 대한 시기심으로 일반화된 감정을 시도한다고 선전한다. 간단하면서 기본적이고, 선전을 위한 완벽한 말인 “시기에 대항한 사랑”이라는 용어를 반복한다. 그는 신화를 창출한 기업가인가? 정치와 돈의 뒷구멍적 거래, 정부의 보호와 원조하에서 독점 시장에서 성장한 기업은 신화가 아니라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자유 경쟁 체제 하에서 독점과 뒷구멍 거래로 성장한 기업가가 한 국가를 이끌면 성공의 신화를 창출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성공 이미지를 통제하는 자는 거의 모든 정치 권력을 소유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언론의 탄압. 2002년 4월에 베를루스꼬니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공식 방문중에 한 인터뷰에서 비아지(Biagi, 정치평론가), 산또로(Santoro, 정치 프로그램 진행자), 루따찌(Luttazzi, 풍자 코미디언)는 국민의 돈을 범죄적 목적으로 이용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 이상 그들이 TV에 출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국영 TV 간부의 의무라고 말했다. 2002년12월 이후, 세 사람은 국영 TV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루따찌와 비아지는 더 이상 계약을 얻지 못했고, 산또로는 덜 중요 시간대에 프로그램 진행을 제의 받았지만 그는 거부했다. 2003년 11월에 뉴요커(New Yorker)는 꼬르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 이탈리아 주요 일간지)의 디렉터였지만 인터뷰 며칠 전에 사임한 페르루쵸 데 보르또리(Ferruccio De Bortoli)를 인터뷰했다. 그는 너무나 심한 압박을 받았고, 사임을 하도록 강요되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97년 이후 현재까지(2003) 적법성(legality)의 수준은 낮아졌고, 블라인드 트러스트 (blind trust)는 없고, 수상의 이해의 충돌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정권은 뭇솔리니처럼 정치적 반대자를 섬으로 귀향보낼 필요가 없이, TV에서 더 이상 말을 하도록 하지 못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의 집권 기간에 이탈리안 매스미디어는 입을 다물었고, 외국의 신문들을 통해서만 이탈리아의 소식의 진실을 접할 수 있었다. 반면에 그와 라이트 정치인들은 안하무인적이면서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했다. 2006년 3월 TV의 한 정치 인터뷰 프로그램 (‘In mezzo’ora’)에서 시작된 지 몇 분만에 베를루스꼬니는 그 프로그램에서 가버렸다. 그 이유는 그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질문자에게 “이제 나에게 질문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지요”, “당신의 경력에 흠집으로 남을 것이다”라는 위협, 그리고 “부끄러워해”라고 하면서 그 프로그램을 져버렸다. 이러한 태도는 소위 말하는 라이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각 정치 대담 프로그램에서 말하고 싶은대로 혼자서 말하고, 레프트 정치인들이 말하는 사이에 끼어들거나 아니면 진행자가 그들에게 다소 불리한 질문을 하거나 끼어들면 가버리겠다고 위협하는 풍조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2005년 11월, 경제 장관 뜨레몬띠(Tremonti)는 한 TV방송의 프로그램에서 참여자와 진행자에게 위협과 모욕을 주고 가버렸다. 단지 한 경제 전문가를 초대했고, 예상하지 못한 질문들을 그에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TV를 그의 개인적 선전을 위해 이용했다. 부시의 목장에서의 베를루스꼬니의 모습을 방송, 재방송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세계 주요 지도자들과 거의 동등한 위치를 갖지 못하고, 단지 그 그룹에 끼이기를 바라는 그는 세계 지도자들과 농담하는 것을 이탈리아인들이 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사진사와 사진 기자들이 그의 사회적 승리를 도큐멘터리하기 위해 그와 함께 여행하도록 했다. 2005년 국민들은 더 이상 그가 말하는 꿈을 믿지 않았고, 놀림을 당했다는 느낌을 갖고 귀찮음과 분노로 반응한다. 하지만 베를루스꼬니는, 슬로건, 이미지, 매디어에 대한 통제, 이미 드러난 과거의 속임수로 현실의 인지를 바꾸고자 하는 희망속에서 계속에서 국민들과 접촉했다. 2006년 1월에 라이트의 한 주간지는 TV 에서 나타나는 레프트들의 가치들을 비난했다. 이것에 따르면, 레프트의 가치는 새로운 이탈리아(베를루스꼬니와 그의 당이 만들고 있는)의 열정을 증오, 시기하고 있고, 상업 TV는 그것들을 전복시키는 떠들석한 쾌락주의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말을 믿을 것이다. 상업 TV 소유자는 베를루스꼬니이다. 세개의 그의 TV 채널은 상업방송 규제 감독 기관(authority)가 규정한 기준을 넘어선 상업 선전과 선정적이고 누드적인 여자의 몸을 사용한 시청율 높이기를 하고 있다. 법 제정. 베를루스꼬니와 관련된 재판은 1993년부터 시작해서 2004년까지 12개 사건의 재판 과정이 있었고, 이중 5개의 사건만이 무죄 확정 판결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실토로 실비오 베를루스꼬니와 마르첼로 델루뜨리(Marcello Dell’Utri) 1992년 5월 23일 시칠리아의 빨레모(Palermo)의 까빠치(Capaci) 에서 시칠리아 마피아에 의한 검찰 죠반니 팔꼬네(Giovanni Falcone)와 그의 부인, 수행원들을 400 킬로의 폭발물로 살해한 사건으로 조사되었다. 이것은 한 마피아 개과자의 폭로로 돈의 리사이클과 위험한 빨레르모 마피아들과의 우정와 얽힌 조사를 받게 되었다. 92년과 93년 사이에 마피아 보스들이 찾고 있었던 “새로운 접촉자”로서 그들 두를 지적했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조사는 2002년 5월 3일에 확정적으로 끝냈지만, 그 끝이 분명하지가 않았다. 베를루스꼬니는그의 개인 변호사들을 상원으로 지명함으로서 그와 그의 측근에 관련된 범죄를 해소기위해 우선적으로 개인화된(ad personam) 법을 제정하는데 힘썼다. 예를 들면, 구 치리엘리(Cirielli) 법. 이 법은,항상 똑같은 작은 범죄를 반복하는, 이민자들, 마약 상용자들, 작은 범죄자들을 타격했고, 감옥을 수감자로 넘치게 했다. 반면에 그와 그와 측근들이 관련된, 중범 (부정)을 저지른 자들은 건드리지 않는 법이었다. 더우기나 베를루스꼬니는 공개적으로 검찰의 일을 하는 자들은 정신적으로 이상한 자들이라고 공격했다. 이해의 충돌(Conflict of interest)문제. 2001년에 다시 정부의 수상이 되었을 때 그의 이해의 충돌(conflict of interest) 문제를 100일 이내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에게 있어, 정치 권력의 목적을 위한 경제력의 비적절한 사용; 즉, 베를루스꼬니는 정부를 교란하기 위해 그의 매스미디어 기업인 메디아세트(Mediaset)를 사용하고, 동시에, 경제력의 강화의 목적을 위해 정치 권력의 비적절한 사용. 즉, 메디아세트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가 필요하다. 93년에 정치계에 들어섰고, 94년의 선거에서 다수의 투표를 얻어 정부의 수상이 되었지만, 6개월만에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많은 빚에 쌓여 있던 그의 메디아세트(Mediaset)는 그의 정부하에서 제정한 뜨레몬띠(Tremonti) 법 – 재투자한 기업의 자본에 대한 세금 감소 – 메디아세트는 수천만 리레 이상의 세금 감세의 선물을 얻게 되었다. 2001년에 재집권한 베를루스니꼬니는 축구 구제법, 가스파르리 법(Gasparri – 베를루스꼬니의 불법 전국 방영 채널을 유지시키는 법), 조건적인 세금 감소법등을 만들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수익을 얻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해의 충돌에 대한 그의 정부의 해결책은 수상은 결정 이전까지 사안을 주재하지만 결정의 순간에는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웃지 않을수 없는 논리였다. 이것을 만든 이는 현재 유럽연합(European Union)의 부의장이면서 이민자 문제 담당하고 있으니 유럽 연합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005년 12월에 국세청은 밀란의 검찰에 추정된 탈세자에 대한 사정을 끝내기 위해 조사 과정을 물었다. 여기에서 베를루스꼬니는 조건적인 세금 감소법에 따라1997년에서 2001사이에 1,500유로와 2002년 300유로, 전체 1,800 유로를 지불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법은 그의 정부가 2002년에 제정한 것이었고, 그는 결코 이 법을 그의 기업을 위해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했었다. 반민주적 행위들. 2005년 10월 국가 공문서 기록원들의 반발이라는 조그마한 기사가 실렸다. 그 시작은 수상 관저는 그의 공문서들을 더 이상 중앙 공문서에 더 이상 제출하지 않고, 그 자체내에서 보존한다는 의도를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각 수상들, 그리고 특히 베를루스꼬니,가 한 덜 투명한 정치 운영의 기록을 제거하거나 감출 위험성을 가질 수 있었다. 2007년 6월에 로마에서 포르짜 이딸리아당의 프라이머리가 있었다. 이것은 베를루스꼬니가 직접 지명하는 책임자(coordinator)를 뽑는 것이 아니라, 20여명의 부 책임자(vice-coordinator)를 뽑는 것이었다. 단지 명목상의 민주주의적인 대표자를 뽑는 프라이머리를 했다는 것을 정치선전화하기 위해 필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단지 형식상의 선전적 요식 행위였다. 그와 라이트는 말뿐인 경제상의 자유주의자들(liberalist)이다. 그에게 편리한 순간까지만 자유주의자이다. 정치적 교사로 산 특권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독점, 기업의 절대주의, 성공의 비도덕적 숭배를 옹호한다. 2001년의 선거 전에 TV 상에서 유명한 이탈리아인들과 약속을 서명하는 쇼를 했다. 펜션을 올려서 2 백만명의 국민을 가난에서 제거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학교, 병원, 과학, 환경에 투자를 하지 않았고, 그의 개인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안, 국가의 나머지 문제들은 미해결로 남겨 놓았다 2006년 6월에 베를루스꼬니 정부는 1,560만개의 새 직업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이미 2001년 중반에 이미 1백만명이 취업을 했다고 발표했다. 그 이후 5년 동안 그 결과는 거의 0%에 가까운 취업율를 가졌다. 왜냐하면 이 기간 (2001-2006)에 이탈리아 통계청 (Istat)에 따르면 80% 이상의 취업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전에 불법으로 일을 하고 있는 이민자들에게 노동허가증을 허락하는 특별법으로 약 650.000 명의 이민자들을 취업 통계상에 포함시키는 속임수를 이용해서, 실업율이 7% 수준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산업 생산 분야의 취업율은 감소되었고, 단지 서비스 분야 그리고 파타임분야에서만 취직율의 증가를 보였을 뿐이었다. 또한 펜셴비를 증가시켰다는 것 등을 주장하지만, 이탈리아 국민들의 소비는 증가하지 않고 오히려 감소되었다. 이 이유는 정부 초기에 리레에서 유로 바뀌는 과정에서 물가 통제를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마음대로 상인들이 물가를 정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이었다. 그 파급의 심각성을 감지했을 때는 정부는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도 없고, 단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변명은 시장의 자유주의에서 정부는 어떠한 개입도 할 수 없다는 말로서 그 여파의 책임을 딴 곳으로 돌리고자 했다. 트윈 타워 공격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프랑스등에서는 생산성이 꾸준히 증가했고, 각 정부들은 가격 통제를 통해 상대적으로 물가 안정을 취한 반면, 이탈리아의 생산성은 0%에 가깝게 감소했고, 정부 지출은 계속적으로 증가했다. 베를루스꼬니 정부의 변명은 트윈 타워의 여파와 중공의 저가격 물품의 공세라고 주장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취업율이 증가했고 펜셴비를 올렸다면, 왜 국민들의 소비는 전혀 증가하지 않았고, 가난함을 느끼게 되었는가? 베를루스꼬니와 그의 정부를 직접적인 대중적 동의에 근거한 개인적인 권위적 특징과 강한 개인적 특성를 가진 만장일치적 투표의 정치 체제인 마키아벨리적 보나파르트 모델의 정권이라고 분석했다. 그의 영향은 베를루스코니즘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추가시켰다. 베를루스코니즘이란 우선적으로, 공공 토론장에서의 소위 말하는 중도주의자 또는 온건주의자는 대화자의 말을 중단시키고,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화자에 반대 논리를 펴고 고집하고 반복하고, 그것에 확신을 주도록 한다는 것이다. 특히, 누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간단하고 상품 선전적 용어를 반복함으로서 국민들을 심취하게 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정치인들의 과다한 TV 출연과 정치적 토론보다는 농담과 비전문가들과의 담소로 시간을 보내고, 연예계의 여자들을 오피니언니스트로 출연시키며, 그들과 노래나 춤을 추도록하는 것이다. 새로운 용어로 인포테인먼트(infotainment)이다. 다시 말해서 인포메이션과 엔터테인먼트를 섞은 것이다. 세번째로, 비판은 ‘린치’로, 정보(information)는 ‘테러리즘에의 부추김 또는 선동’으로 악선전되었다 네번째로, 베를루스꼬니와 그의 연합당은 적들을 증오하고 악선전하면서, 그들은 적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지만, 레프트 당은 단지 증오하는 것만을 안다고 선전한다. 우리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고, 레프트들은 더 많이 가진 자들에 대한 시기심으로 일반화된 감정을 시도한다고 선전한다. 간단하면서 기본적이고, 선전을 위한 완벽한 말인 “시기에 대항한 사랑”이라는 용어를 반복한다. 그는 신화를 창출한 기업가인가? 정치와 돈의 뒷구멍적 거래, 정부의 보호와 원조하에서 독점 시장에서 성장한 기업은 신화가 아니라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자유 경쟁 체제 하에서 독점과 뒷구멍 거래로 성장한 기업가가 한 국가를 이끌면 성공의 신화를 창출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성공 이미지를 통제하는 자는 거의 모든 정치 권력을 소유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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