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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블로그] 바나나 아이들과 영어

등록 2008-02-19 15:04

바나나 아이들과 영어 / 한겨레 블로그 현상
바나나 아이들과 영어 / 한겨레 블로그 현상
파리에 사는 한국 아이들과 혼혈계 아이들(여기서는 유럽과 아시아계를 혼합한 유라시안이라고 부른다) 이 옹기 종기 모여 재정난에 시달리는 허름한 사립고등학교의 교실을 빌려 수요일 오후 마다 한글을 배우고 있다. 파리 한글 학교가 있는 동네는 부르조아들이 많이 살고 있는 부잣 동네이며 우파가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파리 7구이다. 그런 부잣 동네에 그 만큼 가난한 사립학교가 있는 것도 아이러니, 프랜치 파라독스의 일부 현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날도 여느 수요일과 다름없이 한글학교에 아이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시간여유가 있어서 근처 공원에 잠시 앉아 숨을 돌리는데, 옆에 앉은 사람도 한글 학교 학부모인지 핸펀에다 한국말로 수다를 떠는 것이 귀에 들렸다.

« 얘, 이 동네는 정말 너무 심하다. 어째 공원에 백인, 아니 탈색인 밖에 없냐 ? 애들도 그렇고,…동양인이라고는 보모밖에 안보인다. 뭐 ? 왜 탈색인이냐고 ? 야, 지네들이 피부에 색깔이 없는 거지, 어째 지네들이 백인이냐 ? 저건 탈색인이다. 탈색인… ! »

서구 사회에서 ‘피부’라는 단어는 각 개인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인간을 색깔로 구분하는 그들의 기준이 여기서 부터 시작하는 것도 유난히 시각적인 현상에 더 예민한 정신 문화 탓이기도 하지만, 유색인종으로 구분되는 아시아계나 아프리카계에겐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시아계이면서 서구문명에 전적으로 동화된 세대들을 유럽에서는 약간 경멸조로 ‘바나나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바나나 처럼 겉은 노란 피부이지만 속은 백인들 처럼 하얗다고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인수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영어 몰입 교육 어쩌구 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한국 교포들의 자녀들은 바나나 아이들이 되지 않기 위해 남의 학교 교실을 빌려가면서 어렵게 모국어를 배우는데, 한 나라의 고유한 언어가 그 나라의 정신문화와 정체성을 대변한다는 진리를 배반한 채 한국에 있는 한국 아이들을 바나나 처럼, 겉은 한국 사람이고 속은 미국 사람같이 허옇게 만들 것인가 ?

유럽에서는 ‘그래도 한국은 자국어가 있다’ 는 사실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중해 주는지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유럽에 체류하고 있는 동양계 아이들이 단순히 이분법적인 바나나로 변하지 않고 본국어, 문화를 공유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바람직 하게 보고있다. 예를 들어 아시아 국가와 투자, 무역이 활발한 대기업에서 영어, 프랑스어를 쓰는 프랑스인 보다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를 쓰는 한국 사람을 선호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미국 보다 인종적인 문화 구분이 더 확실한 것이 유럽이다. 이것을 차별이라고 불러야 할지 개별성 존중이라고 불려야 할지 모르겠다. 미국에서 영어만 뛰어나게 잘하면 만사통일인 현상과는 틀리다.

한번 생각해 보자, 한글은 1443년에 만들어졌는데, 라틴어나 그리스어등 고대언어의 소유지 유럽식으로 따지자면 중세에 만들어진 ‘신조어’다. 콜럼버스가 1492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으니 비슷한 시절이긴 하지만, 한번 건방을 떨어 보자면, 한글보다 늦게 만들어진 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쩔쩔맨다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라틴어를 비롯, 그리스어가 지배하고 있었다. 아직도 프랑스의 몇몇 고등학교에서는 그리스어를 제 2외국어로 가르치는 풍습이 남아 있지만, 지금 그리스어는 영어 보다 오히려 중국어에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유럽의 젊은이들은 중국에 가서 한번 쯤 일해 보는 것을 꿈꾸고 있으며 경력에도 도움이 되니 각 고등학교에 중국어가 신설되는 한편 중국어 교사들이 모자라서 난리들이다.

그렇다고 영어 교육이 뒷전인 것은 아니다. 영어 교육이 초등학교 일부에서 실시 되고 있지만 당연 자국어가 중심이다.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 영어 되게 못한다. 발음을 아무리 고쳐도 이 사람들은 영어를 불어식으로 한다. 특히 ‘Th’발음을 못해서 그냥 ‘S’ 발음으로 때워버린다. 중학교 부터 선택하는 제 2외국어도 앞서 언급한 중국어, 독일어, 심지어 러시아어등 아주 다양하다. 시대 흐름과는 상관없이 사어나 마찬가지인 라틴어를 배우는 청소년들도 있다. 중세역사나 신학을 전공하는데에 도움이 되니 아주 쓸데없는 언어는 아닌 셈이고, 아직도 라틴어는 상당히 고급언어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니 영어가 필수는 아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이상 따로 열심히 공부해야 할 언어로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역사를 중요시 하는 유럽에서는 영어는 짧은 역사에 변화가 많은 동어이자 실용어이고, 독일어 처럼 게르만어에서 파생되었지만 라틴어와는 달리 고대문학이 없었던 언어이므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짙다. 프랑스 전문 통역사도 미국식으로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데에 80퍼센트 정도 도달한다고 알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서는 영어가 동어라는 단점 때문에 잘 변하지 않는 불어문서를 따로 작성한다고 한다. 변화 많은 영어가 나중에 해석을 달리 할 경우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어에서 파생된 영어 단어나 표현은 얼마나 많은가 ? 대표적으로 누구나 다 아는 ‘앙코르’Encore가 그렇고 ‘샴페인’Champagne이 그렇다.


그렇다면, 곧 올림픽을 치룰 중국에서는 영어가 판을 치는가 ? 시민교육으로 기본적인 영어를 가르친다고 한다. 그러나 21세기 경제가 중국 중심으로 돌아갈 것은 점점 확실해지고 있고, 무엇보다 그 나라는 마르코 폴로가 드나들던 13세기 말 부터 자국문화로 ‘배째던’, 중화중심주의가 골수에 박힌 민족이다. 물론 방대한 국토와 인구의 힘도 있지만 인권문제, 환경문제로 전세계의 비난을 들어도 그들은 ‘잘난 중국인’이다. 파리에 있는 대부분의 일본 식당 간판을 걸고 성황중인 곳이 실은 모두 중국인이 경영하고 있을 정도로 동양계 상업권은 그들이 잠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식당인 줄 알고 맛있게 밥을 먹다 보면 식당 종업원들이 지껄이는 중국어가 들려서 속았다고 생각할 프랑스 사람들은 드물다(손님이 있든 말든, 그들끼리는 꼭 중국어로 떠든다) 그뿐인가 ? 중국인들은 한자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 구조를 띄고 있다고 자랑하며 한자를 배우면 다른 언어는 자연히 뛰따른다는 이론으로 지난 수세기 동안 조선시대 수구파들은 물론이고 서구사회까지 세뇌시켰으며 많은 서구의 학자들이 그들의 언어문명 연구에 인생을 바쳤던 것이다. 한자는 위대하다. 그러나 그들의 ‘만만디’ 정신이 큰 몫을 했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바나나 아이들과 영어 / 한겨레 블로그 현상
바나나 아이들과 영어 / 한겨레 블로그 현상

해마다 구정이면 중국사람들이 파리 시내 중심가에서 퍼레이드를 벌인다. 쿵푸 시범을 보이는 아이들 중엔 프랑스 아이들도 눈에 띄인다.

자국 문화를 서구 사회에 알리는데 탁월한 중국인들. 어느 프랑스인이 중국 연극 분장을 하고 포즈를 취했다. 프랑스에서는 구정을 '중국적인 잔치' fete chinoise라고 부른다. 그러나 음력은 이집트인이 최초로 만든 이집트 문화다. 그러나 모두들 중국문화라고 알고 있을 정도로 중국인들의 타문화 흡수력과 재생산력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저 잘나빠진 중국보다 못한게 뭔가. 코딱지 만한 만한 국토 ? 찢어진 민족 ? 하드 코어로 나가자면 우리가 꿀린다. 그러나 소프트 코어로 나가자면 한국 또한 중국에 버금가는 우수한 문화, 재능을 지녔음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서구 사회에서 한국은 재능있는 민족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왜 몇몇 정치인들은 자존심도 없이, 우리 아이들을 바나나로 만들지 못해서 재능있는 한국 국민을 영어 콤플렉스로 똘똘 뭉치는가?

한국이 치열한 경쟁사회이며 고급 인력자원을 빼고는 무궁무진한 자원이 별로 없는 나라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런 만큼 외국어가 중요하다. 그러나 자국어 무시하는 나라는 타국 의존적인 국가가 되기 쉽다. 세상은 넓고 할일도 많고 그 만큼 돈 벌일도 많다. 돈 벌고 잘 살고 싶으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좀 더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다국적으로 뻗어 나가야지 미국 중심으로, 영어몰입 교육 중심으로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정책이 과연 신빙성이 있는 지 의문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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