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국제 유럽

[블로그] 독일서 운전면허 따기

등록 2008-06-20 18:46

나는 독일서 운전면허를 땄다.

남들이 하듯이 한국면허증을 독일면허증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아예 독일에서 운전면허를 땄다. 그걸 따는데 지금 환율로 300만원 이상 들었다. 남들이 나보고 바보라고 그랬다. 돈도 적게 들고 따기도 쉬운 한국서 따서 오지 왜 독일서 그걸 따냐고. 그리고 서른을 넘기도록 운전면허도 안따고 뭐했냐고.

한때 우리 가족들 간에 운전면허 붐이 일었을 때가 있었다. 막내동생이 제대하고 나서인가 하여튼 휴학을 하고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릴 때였다. 운전학원에 안다니고 면허를 따겠다고 큰소릴 치더니 아버지 차를 몰고 요리조리 차를 조작하며 연습을 하는 거였다. 설마했는데 진짜 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그걸 몰고 제법 길가까지 나가더니 다시 차를 돌려서 돌아올 줄도 알았다.(안심하시라. 그 길은 아버지 소유의 길로 하루 평균 교통량 2,3회)

그렇게 연습을 해서 동생은 아마 그때 학원도 안다니고 운전면허를 딴 걸로 안다. 그것이 우리 집안 세 여자들에게 운전면허 바람을 불러 일으킨 것이었다. 여자들은 너도 나도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그 결과 우리 언니가 필기 실기 한 번에 통과하여 운전면허증을 손에 쥐었다. 우리 엄마도 언니와 함께 운전면허 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운전석에만 앉으면 간이 떨리고, 팔다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거의 열 번 가까이 낙방한 끝에 결국 운전면허 따기를 포기했다. 엄마는 지금도 그때 면허 못딴 것을 애통해 한다. 이 외진데서 자동차는 발이나 마찬가지인데 면허가 없어 나갈때마다 니네 아버지한테 싫은 소릴 해야 한다며.

나는 언니와 엄마가 그렇게까지 따려고 안달일 적에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운전면허 안딴다’를 고수했다. 집안에서고 친구중에서고 우리 엄마만 제외하면 당시 운전면허 없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내가 한국을 떠날때까지 ‘운전면허 안딴다’를 고집했던 이유는 ‘운전하기가 식미에 안맞아서’이다. 내가 저 큰 쇠덩어리를 몰고 다른 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거리를 누비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였다. 차종도 뭐가 뭔지 눈으로 봐선 식별하지 못할 때였다. 모든 차들이 내 눈에는 큰차, 작은차, 노란차, 하얀차였지 연비가 어떻게 되고 승차감이 어떻고 하는 말들은 내게 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던 것이 독일와서 운전면허를 꼭 따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내가 털실가게에서 일하던 중 결국 사장과의 임금협상이 결렬되면서 였다. 때마침 공항에 일자리도 하나 생겼다. 여러모로 매력적인 곳이었다. 직원도 많고 노조도 있고 직원 모두가 스카프를 두르고 유니폼을 입고 일했다. 데스크에서 짐부쳐주고 보딩카드를 발급해주는 ‘체크인 요원’. 월급은 쥐똥만했지만 조건이 좋아 퇴근시 사고가 나도 회사에서 보험처리를 해주고, 퇴근시 수퍼에 들렀다 수퍼에서 일을 당해도 회사에서 보험처리를 해주는 좋은 일자리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자릴 비집고 들어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취업 인터뷰때 듣자하니 새벽 4시부터 일이 시작된다고 그랬다. 출석체크하고 보딩머신에 딱지 갈아 끼우고 컴퓨터 켜고 하려면 새벽 3시 45분까지 도착해야된단다. 새벽 3시 45분까지 공항에 도착하려면 집에서 3시 15분에 출발해야하고, 세수하고 머리감고 얼굴에 뭐라도 찍어 바르려면 2시 30분에는 일어나야했다. 그렇게 화장하고 옷갈아 입고 간단하게 식사까지 하고 새벽 3시경에 집을 나왔는데, 공항까지 뭐타고 가냐고... 다니는 버스도 없고 날마다 자전거나 택시타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로자들에게 운전면허 따기는 공항측에서도 장려하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운전면허를 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평생 운전면허 안딸 것처럼 굴었던 내가 머나먼 타국까지 와서, 그것도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하여 면허학원에 등록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우리 시동생과 남편이 운전면허를 땄다는 ‘베렌즈 운전학원’에 등록했다. 30년 가까이 우리 시댁 바로 옆집에 학원을 차려놓고 운전을 가르쳐온 베렌즈씨는 사람좋기로 유명해 운전연수생이 차를 몰고 모래더미 위로 올라가도 결코 ‘울컥’하지 않는다고 했다. 운전선생 중에 이런 사람 드물다. 사람이 이만하면 우리식으로 ‘운전면허계의 도닦은 보살’쯤 되겠다 싶어 그 학원에 등록했다.

'독일의 운전학원엔 운동장이 없다'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간판은 운전학원이지만 우리나라 식으로 생각해서 규모를 크게 상상할 필요는 없다. 딱 우리나라의 점빵 수준이다. 그 정도 크기의 학원에 학원생 예닐곱 명, 장사 안될 때나 날씨 좋을 때는 두셋 앉혀 놓고 강의만 하는 곳이므로 점빵보다 더 클 필요가 없다. 운동장이 없는 대신 운전연습은 일반 차도를 이용한다.

나는 점빵크기의 ‘베렌즈 운전학원’에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파릇파릇한 남녀 사춘기 애들 너댓 명과 함께 이론수업을 듣는 것으로 ‘독일서 면허따기’ 첫발을 내디뎠다.

베렌즈 운전학원에는 베렌즈씨외에 선생이 하나 더 있었다. 그의 이름이 뭐더라... 생각이 안난다. 그 사람 이름을 륀케씨라고 해두고, 륀케씨가 주로 이론강의를 했다. 륀케씨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나이 50이 다 됐다지만 요즘 세상에 그렇게 바지를 올려서 입는 사람이 있나? 륀케씨는 바지를 늘 갈비뼈 밑까지 올려서 입고 다녀서 안그래도 짧은 상체가 더 짧아 보였다. 게다가 오른쪽 새끼손가락 손톱을 1센티정도 길러 다녔는데 그 새끼손톱의 용도는 담배를 말 때 담뱃가루를 쑤셔 넣기였다.

륀케씨는 입술이 얇아서 말을 할때마다 입술에서 부르르 떨리는 소리가 났다. 그런 와중에 말까지 빨리해서 나는 륀케씨가 강의를 하는 날이면 수업에 흥미를 잃고 졸거나 딴생각에 몰두했다. 그러다 ‘삐그덕’ 하고 문이 열리면서 방문객이 들어올 때 제정신이 돌아오곤 했다. 베렌즈 운전학원엔 방문객도 많았다. 이들은 수업중에도 왈칵왈칵 문을 열고 가게안으로 들어왔는데 대부분 5,60대 여성분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 번은 꽃무늬 치마를 차려입은 여성분이 수업중에 가게안으로 들어와서는,

“어이, 학생들, 여기 베렌즈 운전학원이 함부르크에서 젤 좋은 학원이에요. 여기서 면허못따면 딴데서도 못따요.”

이렇게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하고 나갔다. 졸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나는 아줌마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마 기나긴 시련 끝에 운전면허를 땄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이론수업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날이었다. 드디어 베렌즈씨가 나타나 실기수업에 들어가자고 했다. 내가 운전석에 앉은 첫날이었다. 내가 몰 차는 은색 폭스바겐 골프였다. ‘베렌즈 운전학원’이란 자석딱지가 옆에 붙은. 나는 우리나라 운전연수차처럼 저 딱지가 차 꼭대기에 달렸다면 더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다른 차들이 멀리서도 운전연수생이 모는 차임을 알아차리고 비켜줄텐데...

생전 운전석에 앉아본 일이 없는 내가 운전석에 앉다보니 이게 좌불안석이었다. 단추는 뭐가 그리 많은지... 그중 하나라도 잘못만지는 날엔 차가 폭삭 주저앉을 것 같은 불안감에 아무 것도 못만지고 ‘뚱’ 앉아 있으니 베렌즈씨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좌석 위아래, 앞뒤로 맞추기, 백미러 맞추기, 열쇠꽂아 돌리기 등등... 혼자서 해보니 참 쉬웠다. 순간 운전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내가 맞춘 좌석에 앉아 차를 끌고 거리로 나왔다. 그곳이 에리카 스트리트였다.

이렇게 시작하여 한 두세 달, 그러니까 60시간 넘게 운전연수를 받았다. 첫 두어 시간은 운전학원 근처만 살살 차를 몰고 배회했는데 시간이 거듭될수록 함부르크 시내와 외곽을 누비고 다녔고, 마지막에는 고속도로에까지 나갔다. 평생 거대한 쇠덩어리를 몰고 다른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운전할 것 같지 않았던 내가 이 유명한 독일의 아우토반이란 데를 다른 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게 된 것이었다. 고속도로로 나가 처음으로 120킬로미터를 밟았을 때가 생각난다. 어찌나 빠르게 느껴지는지 온몸에 털이 곧추서는 듯 했다.

고속도로 운전연수도 힘들었지만 야간운전을 처음 배운 날 저녁에도 나는 심한 두통을 느꼈다. 야간운전이라고 주중운전과 다를 바는 없었지만, 모든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니 꼭 모든 차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ㅤㅉㅗㅈ아오는 것만 같았다. 야간운전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내가 운전을 잘하는 날이면 베렌즈씨는 옆에 앉아 입으로 나팔을 불어주었다. 그 나팔소리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공기를 압축해서 나는, 진짜처럼 들리는 나팔소리였다. 60이 넘은 양반이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마구 나팔을 불었는데, 그건 내가 운전을 잘하고 있단 의미였으므로 나는 신이 났다. 그러다 내가 더 운전을 잘 하면 이렇게 소릴쳤다.

“여기보시오, 한국에서 온 Frau Lee가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비키시오, 한국에서 온 Frau Lee가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나는 신호등이 없는 로터리 삼거리나 사거리를 갈때면 늘 실수를 하곤 했다. 기어를 3단으로 넣고 살살 가다가 나오는 차가 없으면 진입해야하는데 보지도 않고 마구 달린 것이었다. 그럴때면 베렌즈씨는 차를 세우라고 해놓고 나에게 ‘술먹었냐’도 아니고 ‘마약했냐’고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베렌즈씨가 주는 면박은 너무 착하게 들려 면박같지도 않았다. 나는 절대 기죽지 않고 다음에도 그 로터리 삼거리를 지날 때면 또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진입했다. 사실 거긴 지나다니는 차도 별로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고속도로운전과 야간운전까지 연수를 마치고 필기시험을 치게 되었다. 필기시험을 볼 때 우리 교실엔 열명 정도 되는 수험생이 모였다. 외국은은 그 중 3명으로 러시아인과 터키인과 나. 러시아인과 터키인들은 각각 모국어로 시험을 봤고 나는 독일어로 시험을 봤다. 나는 당시 외국어로도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알았더라도 아마 한국어로 된 필기시험지는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어쨌든 이 필기시험도 참 까다롭다. 세 문제만 틀려도 떨어지기 때문에 정말 달달 외우지 않으면 떨어지기 알맞았다. 나는 1주일 전부터 문제지를 어찌나 달달 외웠던지 문제의 첫 문장만 읽고, 혹은 문제에 제시된 그림만 보고 정답을 찍는 수준에 이르렀다. 주어진 시간이 50분이지만 내게는 10분이면 족했다. 그러니 만점이란 결과는 당연한 것이었다. 시험감독관이 즉석에서 점수를 매겨 수험생 이름과 점수를 불러줬을 때, 그리고 내 이름이 불리고 100점이 불리고 ‘통과’가 불려졌을 때, 나는 너무나 감격하여 감독관에게 이렇게 물을 뻔 하였다.

“고국에 계신 엄마한테 보내려고 하는데, 혹시 만점받았다는 증명서를 발급해주실 수 있는지요?”

독일에서는 운전면허 실기시험을 치기 위해선 법에서 정한 수업량을 반드시 채워야 한다. 학원에서 실기시험을 위해 제출해야할 서류는 이론수업 몇 시간, 시내운전 몇 시간, 고속도로와 국도운전 몇 시간, 야간운전 몇 시간 운행했다는 서류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실기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통과하고 드디어 실기시험을 치게 되었다. 학생은 당연히 운전석에, 선생은 학생옆에, 그리고 시험관은 뒷좌석에 앉았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 너무 무서워서 좀 천천히 달렸다는 점(시험관이 뒤에서 더 빨리 달려도 됩니다 하고 명령할 정도였다), 앞뒤 주차시 약간 미숙한 점을 보인 것만 빼면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해 통과하였다.

나는 운전면허를 딴 것이 대학입시에 합격한 것 만큼이나 기뻤다. 남들이 보면 ‘그깟 운전면허 하나 딴 거 가지고 되게 생색낸다 할지 모르겠지만, 당시 이 면허 하나는 내 삶에 기운을 주는 활력제였다. 나도 이 외국에서 노력하면 못할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을 운전면허증을 받던 날 느꼈다. 그리고 원하던 대로 차에 공항주차증을 붙이고 날마다 공항으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방만구씨와 나는 둘다 면허따는데 300만원 이상 들었다. 도합 600만원, 아니 700만원. 보통 그 반이면 된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말짱 거짓말이었던지 교통량이 적던 옛날에나 그랬던 건지... 아니면 우리 둘다 운동신경이 형편없이 나빠 남들보다 배가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우리는 면허를 따는데 너무 많은 돈을 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똥차를 사야만 했다. 원래는 7000유로(천만 원 좀 넘는 돈)정도 주고 5년정도 된 폭스바겐 골프나 폴로를 사려고 했지만 당시 우리에겐 면허따느라 돈을 너무 쓰는 바람에 현금이 없었다.(내 사전에 월부나 빚은 절대 없다. 항상 현금박치기) 그래서 우리가 현재까지 몰고 다니는 닛산 미크라를 4000유로 주고 샀다.

내가 이 닛산 미크라를 똥차라고 부르긴 하지만 방만구씨가 그렇게 부르면 화를 낸다. 이 차에겐 엄연히 이름이 있기 때문다. 차 색이 청록색이라 '청동이'라고 이름붙였다. '청둥이'가 아닌 '청동이'. 요 놈을 정면에서 자세히 보면 얼굴이 참 똘망똘망하게 생겼고 눈도 똘망똘망하게 생겼다. 참 순수한 얼굴이다. 요렇게 똘망하게 생긴 놈이 효자이기도 하다. 기름도 적게 먹고 지금까지 잔고장이라곤 한 번도 안났다. 이걸 몰고 폴란드까지 간 적도 있었고 앞으로도 프랑스건 오스트리아건 덴마크건 어디건 끌고 다닐 생각이다. 언젠가 이놈을 팔아야 한다면 나는 참 슬플 것이다.

내가 일했던 털실가게 사장님의 삼촌이자 엔지니어이며 20년동안 한 자동차를 소유하고 계셨던 엉클 프란쯔는 자동차를 사려는 내게 이런 조언을 해주셨다. 좋은 집을 만나는 것과 좋은 차를 만나는 것은 순전히 운명이라고. 그러니 중고대리점에서 사건 개인한테 사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80노인다운 조언이었다.

나는 청동이를 우리집 근처 밀밭 한가운데 있는 르노대리점에서 샀다. 내가 청동이를 만난 건 정말 운명이었을까? 한국에서 면허를 땄더라면 학원비를 아낄 수 있었고 그랬더라면 좀 더 비싼 차를 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돈이 조금 더 들긴 했지만 독일서 운전할 때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제대로 배웠으니.

뭐, 여기서 내 얘기는 끝났다. 그런데 나는 얘기가 끝난 이 마당에 한국면허를 가진 사람들한테 물어볼 것이 하나 있다. 한국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나올 법한 한가지 질문인데 무엇이 정답일지 정말 궁금하다.

질문: 운전자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운행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1. 일반 도로와 마찬가지로 그냥 달린다.

2. 보행자가 있을 시 위협을 하며 지나간다.

3. 서행을 하다 보행자가 있으면 정지한다.

4. 서행을 하다 노약자가 있을 시 내려서 도와준다.

나는 이 문제를 그냥 웃자고 낸 것이 아니다. 한국 운전면허 필기시험 정답은 어떤 것인지 진짜 궁금해서 적어본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이 일반 도로를 건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하기 때문이다. 횡단보도를 뭐하러 그려놨는지 의심이 생길 정도다. 그러니 정답은 1번이 맞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2번처럼 행동하는 운전자들도 상당히 있으니 2번이 정답일 가능성도 있다. 헷깔린다. 하지만 내가 추측건데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답은 3번일 것이다.

독일에서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 처럼 횡단보도에 사람이 얼씬거리면 차들이 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에서의 경험에 인이 박혀서 그런지 횡단보도에선 차를 먼저 보내주는 것이 맘편하다. 오죽하면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려다 차가 오면 안건널 것 처럼 딴짓을 하다가 차가 지나간 뒤에 횡단보도를 건너겠는가.

내가 아는 언니의 어머니가 두 달 전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택시에 받쳐 숨지셨다. 언니는 한국에 다녀와서 한동안 우울증에 걸려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뻔한 소리같지만 우리나라 운전자들 제발 좀 운전학원에서 배운대로 운전좀 했으면 좋겠다. 제목이 ‘독일에서 운전면허 따기’지만 오죽 답답하면 내가 이런 말로 결론을 내리겠는가.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국제 많이 보는 기사

트럼프 ‘호주 관세 예외’에 일본 “우리 철강·알루미늄도” 기대감 1.

트럼프 ‘호주 관세 예외’에 일본 “우리 철강·알루미늄도” 기대감

‘누가 뭐래도 내가 실세’...트럼프 앉혀두고 오벌오피스에서 브리핑 2.

‘누가 뭐래도 내가 실세’...트럼프 앉혀두고 오벌오피스에서 브리핑

트럼프, 요르단 국왕에 대놓고 “미국이 가자지구 가지겠다” 3.

트럼프, 요르단 국왕에 대놓고 “미국이 가자지구 가지겠다”

D-30, 트럼프 철강 관세 실행 …BBC “한국도 영향 불가피” 4.

D-30, 트럼프 철강 관세 실행 …BBC “한국도 영향 불가피”

“이혼해도 가족”…데미 무어, 치매 브루스 윌리스 매주 찾아가 5.

“이혼해도 가족”…데미 무어, 치매 브루스 윌리스 매주 찾아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