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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블로그] 독일 아이들은 잠이 부족하지 않아

등록 2009-02-26 14:42

“아니 지금이 몇 신데 이제서 들어오는 거야! 또 잤니?”
“…….”
“그런데 자도 그렇지, 오늘은 어째 다른 날 보다 더 늦은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종점에서 돌아 나오다가 또 자서 학교 앞까지 다시 갔다 왔어.”
“옴마야~! 네가 인간이니? 정신 좀 차려라 제발! 밤에는 잘 잠 다 자면서 왜 그렇게 둔하게 구는 거야. 한국 아이들 생각해봐. 너보다 절반밖에 안자고도 정신 차리고 잘 다녀. 그리고 창피하지도 않니? 독일 아이들이 버스 안에서 자는 것 봤어?”

“그게 짜증나 엄마! 난 왜 이런 거야. 내 마음대로 안 돼. 나라고 하고 싶어 그러는 줄 알아?”
“얼씨구! 외려 더 큰소리네.”

엄마 잔소리를 피해갈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요 녀석이 꽤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더 심각한척 너스레를 떤다.


배가 고파 죽겠다고 소리치며 뛰어 들어오던 녀석이 때가 되어도 소식이 없으면 처음엔 겁이 덜컥 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젠 ‘또 종점까지 갔구먼!’ 익숙하게 여유를 부리게 되었다. 그런데 한두 정거장 더 간 것은 이제 놀림거리도 아닌데 학교를 다시 갔다 왔다니. 어떤 때는 분명 탈 때는 문 쪽에 앉았는데 일어날 때보니 창가에 있더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들어오는 날도 있다. 누구를 닮아서 저토록 신경이 둔한건지. 분명 예민한 나를 닮은 것은 아닐 테니, 제 아빠겠지.

2년 전 우리가 본래 살던 시내와 좀 떨어진 외곽으로 이사 온 후 버스 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 아들의 하굣길은 잠과의 전쟁이다. 아기 때는 잘 울지도 않고 밤에 단 한 번도 깨지 않는 녀석이 대견했었다. 엄마보다 일찍 잠들어서 늦게 일어나는 착한 아기, 덕분에 힘든 줄 모르고 쉽게 키웠던 것 같다. 그때는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니만, 한창 공부해야할 나이에 아직도 잠버릇이 그대로니 요즘은 미워 죽을 판이다.

그래도 공부할 때 집중력 하나만은 꽤 좋은 편이라, 그것이 고민 없고 잡념 없는 천성 때문이라고 애써 위안을 삼아 보기도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 터라 녀석의 너무 둔한 신경에 한 번씩 짜증이 나곤 한다.

가끔은 버스 안에서 퇴근하던 아빠를 만나기도 하는 모양인데 가관 중에 그런 가관이 없다고 한다. 꾸벅꾸벅 조는 것이 아니라, 이건 완전히 입까지 ‘헤~’ 벌리고 깊은 잠에 빠져 단꿈까지 꾸고 있단다. 하도 한심해서 남이 안보는 틈을 타 뒤통수를 여지없이 세게 한방 쥐어박았는데, 눈을 번쩍 뜨고 두리번거리더니, 쥐어 박힌 머리를 극적 거리면서 입을 한 번 ‘쓱’ 닦더니, 다시 ‘픽’ 고꾸라지는 것을 보고는 제 아빠도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차 안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독일은 버스에서는 자는 아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살짝 꾸벅거리는 사람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이들은 애나 어른이나 밤 시간에 잠을 충분히 자기 때문이다. 잠을 줄이고 뭔가를 한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초등학교 아이들은 저녁 7시만 되면 대부분 잠자리에 들어있다. 한 여름에도 대여섯 시만 되면 길에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없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잠자는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국 김나지움 아이들은 12시가 넘도록 공부해도 부족하다고 설명하면 놀라 자빠진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장 먼저 흘러나오는 말이 ‘그럼 건강은 어떻게….’이다. 이것도 독일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때 큰아이 친구 엄마들에게 하던 이야기지, 이제는 민망해서 이런 말은 좀처럼 꺼내지 않는다.

‘잠’하면 떠오르는 여고시절 교실 풍경은 세월이 지나 곱씹을수록 웃음이 나고 어이없을 때가 많다.

“차렷, 경례!”
“선생님 감사합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아이들은 정말 ‘총 맞은 것처럼’ 쓰러졌다. 그 짧은 5분 동안 노트에 침까지 흘려가며 깊이도 잤던 것 같다. 낙엽 구르는 소리에 눈물짓고, 남학교 담장만 봐도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던 수줍은 사춘기 소녀들은 모두 어디 갔는지, 쉬는 시간 교실은 ‘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아귀들로 그득했다.

그때는 너나없이 피곤한 눈으로만 세상을 보다보니 고등학생이 되면 누구나 잠이 많아진다고 생각했었다. 등교버스에서 운 좋게 자리라도 하나 얻어걸리면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눈부터 감았고, 어디서든 잠깐이라도 쉬는 틈만 나면, 등 기댈 수 있는 손바닥만 한 공간이라도 나타나면 필사적으로 잠을 청했다.

그런 아이들을 어른들은 전혀 측은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투를 벌이고 있는 우리에게 ‘그 때가 그래도 가장 좋을 때다’라고 하면, 참! 뭐가 좋다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원시적인 삶이 가장 좋을 때라고? 젠장!

그 생각이 나서 어느 날 문득 고등학교 1학년 독일 아이들은 교실에서 어떤지 큰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너의 반에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엎드려 자는 아이들 있니?”
“아니, 왜자? 아참! 한두 명 있을 때도 있어.”

“와! 걔네들은 밤에 공부를 그래도 꽤 열심히 하는 모양이네.”
“공부? 잠 안자고 공부하는 아이들이 어디 있어! 오락하느라고 그러지.”

“그럼 너는?”
“나? 배고파 죽겠는데 잠이 오겠어? 빵 먹을 시간도 없는데.”

역시나 그럼 그렇지. 기대했던 내가 잘못이지. 녀석도 노는 시간 틈틈이 빵을 먹어야하기 때문에 잠잘 시간은 없다고 한다. 우리 아들에게 잠보다 더 중요한 빵이 있다는 사실이 이때는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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