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잠시 공부하는 동안 대학가를 오락가락하며 독일 대학생들을 옆에서 지켜 본 적이 있었다. 이미 두 아이의 엄마요, 살림하는 아줌마의 시선으로 본 젊은이들의 생활이 내게 남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었지만, 은근히 대학가에서 엿볼 수 있는 낭만을 구경이라도 하게 되길 기대했다. 대학시절 학교 정문을 출발점으로 끝이 없이 늘어서 있던 술집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열어 젖혀진 문 안에서 보이는 얼굴들은 흥건히 취해 토론하든 노래하든, 낄낄거리고 웃든 울든 모두 다 심각했다. 술자리가 끝나면 으레 한두 명은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던 모습 들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활이었고 낭만이었다. 고성방가 하는 모습조차도 지성인이란 이름하에 싫지 않게 보였다. 왜 그렇게 마셔댔던 것인지. 입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주체할 수 없어 벌였던 축제였던 것 같기도 하고, 자유의 광장으로 달려 나오기는 했지만 진정한 자유를 찾지 못한 절망감을 달래기 위해 그랬던 것도 같다. 실연의 슬픔을 감추지 못해서였는지, 독재의 피 냄새가 역해 발버둥 쳤던 것인지 여하튼 우리는 술 권하는 대학에 길들여져 있었다. 술, 데모, 연애는 대학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양념이 아니라 필수조건이었다. 상아탑의 의미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공부다운 공부는 이미 입시를 위해 모두 마쳤다고 생각하니, 대학은 ‘낭만을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존재하는 놀이 공간이어야 했다.
그런 내 대학생활을 생각하며 독일 대학생들을 보면 측은한 생각까지 든다. 어깨를 활짝 펴고 희희낙락 하고 싶은 짓은 다 하고 돌아다니는 중고등학교 아이들에 비해 대학생들의 생활은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들이 어울려 다니며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하는 모습은 별로 못 본 것 같다. 기껏 해 봐야 생일 같은 주제가 명확한 파티에서나 한 번씩 취해보는 것이지 술 마시는 일이 우리처럼 익숙하게 생활화 되어 있지는 않다. 물론 직장인이나 대부분의 성인들도 우리처럼 왁자지껄한 술 문화는 없다. 한국인은 끼리끼리 모여 폭주를 하는 반면, 독일인은 혼자 집에서 홀짝거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위가 망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이들은 알코올 중독자가 많다니 일리 있는 말이다. 독일 학생들이 자주 마시는 술이라면 그나마 맥주를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다. 그것도 우리처럼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배가 터지도록 마셔대는 것이 아니라, 안주도 없이 한 잔 달랑 시켜놓고 커피 마시듯 홀짝거리며 서너 시간을 떠들며 앉아 있는 게 고작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술도 중고등학생들이 더 많이 마시는 것 같다.
독일은 16세가 되면 성년으로 인정하고 맥주 마시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고등학교 1학년 정도 나이다. 수업시간에도 자랑스럽게 전날 과음해서 속이 쓰리다고 떠벌이는 녀석들이 있다고 하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맥주를 허락했다고 하지만 술이란 게 어디 그런 가, 맥주에 입대기 시작하면 슬슬 포도주 맛보려 하고, 곧이어 슈납스에서 보드카까지 겁 없이 벌컥거리는 아이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가까이 하지는 않지만, 마시려고 마음만 먹으면 고등학생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또 독일의 술 문화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이미 호기심으로 술을 마실 나이는 지나기도 했고, 또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는 데 있다. 부모의 도움 없이 학교에 다니다 보니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동분서주 하느라 질펀하게 한자리에 앉아 술 먹을 시간도 없고, 외모에 신경 쓸 여유도 없다. 대학가에 돌아다녀 보면 허름한 잠바 하나로 한 계절은 버텨내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남학생은 그렇다 치고 여학생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풋풋하면서도 세련된 멋쟁이는 대학가에 가면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대학가에서 예쁘게 화장하고 잘 차려입은 여대생과 마주치기는 쉽지 않다. 독일에서 진하게 화장하고 한껏 멋을 부린 여학생은 김나지움이나 레알슐레와 같은 중고등학교 부근에 더 많다. 독일 아이들이 가장 멋을 부리는 시기는 13- 18세 정도의 나이인 중고등학교 때다. 아직 어려서 세련된 맛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호기심만큼 마음껏 해볼 것 다해 보는 시기가 바로 이때다. 간혹 진하게 화장하고 멋이란 멋은 다 부리고 희희낙락 걸어가는 여자아이들을 향해 ‘그대로 두어도 뽀송뽀송하고 예쁜 얼굴을 저렇게 촌스럽게 만들다니.’라며 혀를 끌끌 차고 있는 것을 보면, 나도 이제 늙기는 늙은 모양이다.
엊그제 시내에 있는 서점에 나갔다가 올해 대학을 들어간 우리 아이 친구 형을 만났다. 김나지움 때는 그렇게 훤하게 잘생겼을 수가 없더니만, 요즘 세미나 준비 때문에 잠을 못자서 그렇다면 누렇게 뜬 얼굴로 부스스한 머리를 해가지고 나타났다. 김나지움 때만해도 하고 싶은 일은 죄다 하고 돌아다니는 것 같더니, 우리 아이 친구 말로는 대학 입학 한 후론 밤 세우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고,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엄청 예민해져 있다고 한다. 독일 대학은 시험 점수가 부족하면 인정사정없이 재시험을 봐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재시험에도 떨어지면 구술시험으로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그도 안 되면 결국 학교를 그만두어야 한다. 게다가 과목마다 읽어야 할 산더미 같은 세미나 자료, 실습, 실험 등 공부에 대한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졸업률이 입학 인원의 50%밖에 안 되는 것만 봐도 대학공부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제 학제가 바뀌어서, 학부 성적이 부족하면 대학원 진학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대학에서 공부하는 일이 예전보다 더 만만하지 않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스스로 좋아서 선택한 학문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그리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지는 않다. 또 아무리 힘들다지만 우리나라 입시에 비할 수야 있겠는가. 햇빛도 제대로 보지 못해 핏기 없는 얼굴을 한 한국 고등학생들이나, 드디어 긴장이 풀어지고 인생의 절정기를 만끽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을 생각하면 독일과는 달라도 좀 많이 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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