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94주기를 맞은 24일, 아르메니아인들이 수도 예레반의 추모 조형물에 모여 터키를 비난하며 대량학살을 인정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예레반/AFP 연합
터키 전신 오토만제국 대학살로 오랜 갈등 쌓여
양국 관계 정상화 합의…아르메니아 야당 반발
양국 관계 정상화 합의…아르메니아 야당 반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1917년,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터키와 아르메니아가 동의하는 부분은 딱 여기까지다. 아르메니아는 터키의 전신 오토만제국에 의해 150만명이 살해된 계획적 ‘대량학살’이라고 주장한다. 제국 치하에 살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나톨리아에서 지금의 시리아와 이라크로 강제이주되면서, 터키인들에 의한 학살과 굶주림 등으로 숨졌다는 것이다. 반면, 터키는 오토만제국이 붕괴되는 혼란의 와중에 30만~50만명이 숨졌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오랜 갈등 끝에 터키는 1993년 아르메니아와의 국경을 아예 폐쇄해 버렸다.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판한 터키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무크가 국가모독죄로 기소되고 극우파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피신한 것은 이 사안의 민감성을 잘 보여준다.
아르메니아 학살을 놓고 1세기 가까이 갈등을 겪어온 터키와 아르메니아가 지난 22일 역사적 관계회복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두 나라는 이날 공동성명을 내어 “상호 존중 및 평화와 안정을 진전시킬 우호적 관계 발전에 동의했으며, 관계 정상화를 위한 포괄적인 틀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24일 아르메니아 학살 94주기를 이틀 앞둔 역사적 합의다. 두 나라는 외교관계 회복, 국경 개방 등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몇주나 몇달 안에” 마련해 서명할 계획이다.
앞서, 지난해 9월 압둘라 귈 터키 대통령이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을 방문해 축구경기를 관람했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최근 터키 방문 때 두 나라의 관계 회복을 촉구했다. 이번 합의로 터키는 유럽연합(EU) 가입의 커다란 걸림돌을 치우게 됐다. 또 빈국 아르메니아는 적대국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에 둘러싸여 내륙국으로 고립됐던 제약에서 벗어나게 됐다.
두 나라가 관계 회복에 합의했지만, 걸림돌은 많다. 당장 아르메니아 야당 등은 “대량학살을 인정하기 전에는 관계 회복은 안 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23일 예레반에서는 수천명이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웃 아제르바이잔도 변수다. 아제르바이잔은 이날 두 나라의 관계 회복에 앞서, 자국내 아르메니아인 다수 거주지역인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옛소련 붕괴 과정에서 두 나라는 이곳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현재는 아르메니아가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 터키는 경제적으로 밀접하고 같은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또 천연가스 부국인 아제르바이잔이 터키를 거쳐 유럽연합으로 보내는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할 경우, 러시아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하려는 유럽연합의 계획도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무엇보다 양쪽이 이번에 대량학살이냐 아니냐에 대한 결론을 미룬 것은 언제든지 관계 회복을 위협할 수 있다.
<로이터> 통신은 23일 “이번 합의는 터키가 유럽연합과 미국을 만족시키고, 좀더 균형 잡힌 캅카스(카프카스) 지역정책을 추구하기 위해 전통적 무슬림 동맹국가인 아제르바이잔과의 연대를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현재 프랑스, 러시아, 캐나다 등 20여개국이 “아르메니아 대량학살”을 인정하고 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1915년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현장
아르메니아와 터키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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