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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블로그] 클래식의 나라에서 클래식이 실례라고?

등록 2009-04-29 17:04수정 2009-04-30 11:50

베토벤,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하이든 등등, 음악에 문외한인 나도 많이 들어본 독일 음악가들이다. 처음에 무식한 나는 클래식의 고향과 같은 이 나라에 오면 모든 사람들이 그 속에 젖어 음악처럼 살고 있을 줄 알았다. 햇볕 좋은 날 양지 바른 노천카페에서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나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갓 내린 원두커피를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건 한국 TV에서 유럽의 시가지가 나올 때마다 흘러나오던 익숙한 음악과 풍경들이라 나도 모르게 허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비슷한 카페는 있어도 음악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우선 적잖이 실망했는데, 한 번은 클래식에 대한 확 깨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다. 나의 20대는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분위기 좋은 카페만 있다면 적지 않은 커피 값에 가벼워지는 지갑의 무게를 아까워할 줄 모르고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 곳엔 언제나 손님이 많지 않아야 했고, 잔잔한, 때론 가슴을 쓸어내리는 음악이 있어야 했다. 클래식이라면 장중한 정통 음악보다는 세미클래식 정도가 좋았고, 80년대를 살았지만 대중가요는 언제나 70년대로 거슬러가고 싶었다.

독일에 살면서도 가끔은 그런 여유가 그리워지지만 간단하게 아침을 먹을 장소는 많아도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몇 시간을 빈둥거릴 수 있는 음악카페는 흔치 않다. 간혹 있다 해도 음악이 없거나 있어도 터져라 질러대는 소리에 잠시도 앉아있고 싶지 않다.

한동안은 어디를 가도 한국식의 조용한 음악카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내가 독일인들을 가장 많이 알 수 있게 된 계기는 잠시 백화점 직원식당에서 판매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손님이 항상 붐비는 것도 아니고 점심시간에 잠깐 우르르 모여드는 직원들만 상대하면 되는 일이어서 계산대는 항상 한가했다. 더구나 뜨내기손님 없이 매일 보는 직원들만 상대할 수 있어서 독일어가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 심심하기도 하고 혼자 매장을 지키는 일이 따분해서 좋아하는 새미클래식 CD를 몇 장 가져가서 돌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인지 고막이 터져라 질러대는 소리는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가한 오전 시간 들어온 첫 번째 커피 손님이 음악을 좀 바꾸어 줄 수 없겠냐는 주문을 해왔다. CD를 정지시키고 라디오를 켜니 다시 내용도 알 수 없는 시끌벅적한 헤비메탈이 흘러나왔다. ‘이제 됐냐?’라는 듯 눈신호를 보내니 손님은 아주 만족한 얼굴로 웃어주었다.

그 후 몇 명의 손님으로부터 재차 비슷한 주문을 받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개인의 취향이겠거니 여겼지 내가 실수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떤 깐깐한 50대 여자 손님의 직선적인 조언으로 그제야 겨우 감을 잡았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클래식은 좋아하는 사람이나 즐기는 음악이지 공공장소에서 트는 것은 실례라는 것이다. 또한 클래식뿐만 아니라 모든 조용하고 가라앉는 음악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주의해서 틀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후론 나도 어쩔 수 없이 시끄러운 음악에 익숙해 져야만 했다. 그러면서 곰곰이 ‘나는 왜 슬픈 리듬이 더 편했던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요즘 젊은 세대는 약간 달라졌지만, 우리시대 대중가요는 슬픈 사연들이 많았다.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드나들던 통로는 언제나 메케한 최루가스에 절어 있었고, 데모라도 있는 날 저녁이면 들을 수 있었던 ‘아침이슬’, 한잔 걸치면 울분을 토해내듯 부르곤 했던 ‘임을 위한 행진곡’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쨌든 독일인들은 조용한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그런 음악을 트는 것도 실례였다.


국민가요인 폴크스뮤직 역시도 우리나라 트로트처럼 처량한 가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명랑하고 경쾌하다. 생각해 보니 이들이 우리 대중가요 속에 깃든 깊은 한을 이해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을 침략해 보기는 했지만 침략 받아보지 않은 사람들, 가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세대, 잘사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보호받고 자란 사람들, 우리와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정서적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가끔 벼룩시장 같은 곳에서 쓰레기통을 뒤져 모은 헌 물건들을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이슬람 사람들을 본다. 그들의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에 바삐 가던 걸음을 늦추고 괜히 서성이며 늦장을 부릴 때가 종종 있다. 처음 듣는 노래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애잔한 선율과 한 서린 음색이 왠지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슬픔의 무게가 우리와 많이 닮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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