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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역사관을 심어주는 교육, 독일 역사수업

등록 2009-05-18 15:36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근간을 이루는 주문이다. 누군가 암기의 한 방편으로 시작했던 이 말은 유행가 가사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한국역사라는 나무의 가장 굵은 줄기다. 여기다가 곁가지로 사건사고나 좀 외워서 살을 갖다 붙이고 연관성 있게 잘 맞추어 나가면 역사공부 끝. 그렇게 내 머리 속에 역사라는 과목의 의미는 누가 계보를 확실히 외우고 있느냐에 따라 성적이 좌우되고 그걸로 어디서든 역사 좀 한다고 우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못해서 우왕좌왕하는 아이들도 허다하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역사는 대표적인 암기과목 중 하나였다.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역사가 왜 인문과학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로 내 주변에 역사를 잘했던 친구들을 보면 사회 보다는 수학적인 머리를 잘 굴렸던 아이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역사관? 사실 난 그런 방법이 역사관을 제대로 잡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무식했다. 특히 역사과목 잘한다고 은근히 우쭐해 하던 친구들이 그런 확신에 더 부채질을 해주곤 했다. 그런 역사관(?)을 가지고 독일 아이들이 역사 공부 하는 것을 보고, 처음엔 의아할 때가 많았다. 이게 도대체 역사야, 독일어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서술할 때도 많고, 중세에 대해 배울 때는 미술시간인지 역사시간인지 구분가지 않을 때도 있다.

독일 아이들의 첫 번째 역사공부는 보통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시작한다. 3학년 들어와서 처음으로 역사를 시작한 작은 아이의 관심사는 우리 동네 부로히바이덴이다. 이것저것 물어오는 통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공부하고 있다.

한국처럼 계획된 신도시가 거의 없는 독일은 작은 한 동네의 역사도 웬만하면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리가 사는 부어젤른이라는 작은 도시는 34.4킬로미터의 면적에 약 3만6천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아헨의 위성도시 중 하나다. 서기 870년에 독립된 도시로 인정받기 시작한 이곳은 곳곳에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어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기록보다 훨씬 전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사는 부로히바이덴은 동네 중심을 통과하고 있는 고대 로마인들이 건설한 도로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유서 깊은 작은 마을이다. 이런 기본적인 지식을 확인하기 위해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동네를 일주 하며 유적과 유물을 직접 견학 관찰하고, 마을을 상징하는 문장을 그리며 구체적인 역사공부를 시작한다.

그 다음 등장하는 주제는 보통 ‘기사’가 많다. 중세를 대표하는 기사는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좋은 소재다. 대부분의 수업은 딱딱한 역사적 지식보다는 기사들의 복장과 그들이 좋아하는 칼은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 그들이 살던 성의 구조와 형태, 상하 구조, 계급 등 재미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일반적인 지식은 저절로 습득할 수 있도록 접근한다. 기사를 배우며 가볍게 중세를 맛보는 것이다.

본격적인 역사 공부가 시작되는 때는 김나지움 입학 학년인 5학년부터다. 이때가 지금 10학년인 우리 큰아이에게 가장 역사가 어려운 과목이었다. 년도를 외우고 사건사고와 특징적 시대유물을 외우는 일에는 당연 문제가 없지만 건물이나 그림 등 상징적인 문화재들을 시대상에 맞게 분석하고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아들에게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특히 종교가 기독교도 아닌 아이가 중세의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가 봐도 정말 어려워보였다. 그 땐 나도 참 의아했다. 이게 왜 역사공부 인가. ‘도대체 미술사도 아닌데 그림을 이렇게 자세히 알 필요가 있는 거야?’라고 투덜거리며 아이가 숙제 때문에 끙끙거리면 조금도 나을 바 없는 엄마가 함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곤 했다.

최근 큰 아이의 역사수업 주제는 ‘2차 대전과 히틀러의 독재’였다.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은 시대상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나 사진들을 준비해 온다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사진과 그림을 보고 역사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스스로 유추해서 느낌을 이야기 하면서 주제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서도 년도나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흐름과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발생한 원인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고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는지, 또 그 결과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다른 나라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검토한다.

수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 주제가 끝나고 마지막에 하는 토론이다. 아이들은 지금까지 배운 역사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견해와 입장을 밝힌다. 우리 아들 수업시간을 보면 ‘2차 대전과 히틀러의 독재’에 대해 배우고 나서 ‘우리는 과연 2차 대전을 무산 시킬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였다. 이 토론에서 아이들은 ‘제지할 수도 있었다.’와 ‘우리는 전쟁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란 두 가지 주장으로 팽팽히 맞서며 그 당위성과 방법론을 제시한다.

‘만일 우리가 좀 더 적극적이고 계획적으로 시도했더라면 히틀러의 독재와 전쟁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와 ‘생명에 위협을 느낀 인간은 당연히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는 결과적으로 막지 못했을 것이다.’ 등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고 한다. 토론은 대부분 마지막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난다. 선생님도 아이들이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 줄 뿐 일체의 논점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고 결론내리지 않는 조력자역만 한다.

그런 교육을 받는 과정 속에서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역사를 돌려놓을 수도 있었을 독일인의 크나큰 실수와 수동적 무사안일주의를 비판하는 시각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올바른 역사관도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큰아이는 역사숙제 하느라 컴퓨터를 끌어안고 네다섯 시간을 씨름하고 있다. 뒤에서 은근히 넘겨보며 아이가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확인하곤 하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주제에 한 마디 했다. “그게 역사야? 독일어 작문 숙제야? 왜 그렇게 차이가 없어?” 그리고는 은근슬쩍 말꼬리를 물고 취재를 시작한다. 우리 아들이 다니는 독일학교의 ‘역사수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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