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여름 말경 맆시아 (Lipsia)에서의 시민 집회들은 구 동독권력 기구에게 하나의 가시가 되기 시작했다. 한주가 지날때마다 시위자들은 두배로 증가했다: 천명, 이천명, 사천명. 10월 초에는 이미 이만명으로 증가되었다. 호넥커 (Honecker)는 중국 천안문식 방법으로 진압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정치국의 국가 안전 담당자인 크렌쯔 (Egon Krenz)는 거부하고 망명했다. 맆시아의 시위는 이제 삼십만이 되었다.
구 동독 비밀 경찰국 (Stasi)의 중령 Harald Jaeger는 지친 상태에 있었다. 상부로부터 정확한 명령을 전화상으로 받고자 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시위자들에게 발포할 것인가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시기는 변했고, 정치 경찰의 장교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규칙을 알지 못했다. 11월 9일 사일 전에 인상적인 시위가 있었지만, 구동독 정권은 반응하지 않았다. 더우기나 몇 달 전부터 헝가리를 통해서 구서독에 도착한 많은 구동독인들이 장벽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대락의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의 구동독의 상황이었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구동독인과 구서독인들의 다수에게는 통일은 실패했다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구동독인들의 축제는 언제 끝났는가? 장벽의 붕괴 몇 달 후, 새로움에 대한 열정은 미지의 두려움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 기간 동안 권력 (authority)은 존재하는 것을 멈추었다. 왜냐하면 권력은 어디에나 있었고, 권력은 갑자기 깨어난 구동독인들 자신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무서움은 구동독인들의 분위기를 바꾸었고, 시민들은 하나의 지도자를 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지 자유만을 이야기했지만, 후에 는 독일인들의 통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인공은 구동독인들이었지만, 몇 달 후 콜 (Helmut Kohl)이 주인공 되었다.
오늘날 왜 통일의 실패감이 몹시 확산되고 있는가? 왜냐하면 진짜, 새로운 시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통일된 상태가 아니라, 명백하게 구동독을 구서독에 끼워넣기 (embedding)였을 뿐이었다: 양쪽의 잘못은 구서독인들은 단지 승리자로서 느꼈고, 구동인들은 자신들의 가난을 경제적 기적의 땅으로 옮기는 것 이외에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동독인들이 느끼는 통일에 대한 감정은 무엇인가? 구서독인들에게 구동독인은 “구동독인중의 하나”로, 맆시아에서는 “우리들 (동독인)중의 하나”로서 취급되어진다는 것이다. 장벽 붕괴 당시 구동독인들은 구서독인들보다 더 진지했고, 더 집중적이었고, 아이러니를 모르고, 몹시 천진난만하게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독일의 통일에 대한 실망과 좌절은 당시의 반체제인사들 사이에서 강했다. 시위 행진의 영웅들은 자신들을 한 쪽에다 제쳐놓은 것에 씁쓸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통일의 과정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보취급을 당했다고 느끼고 있다. 구동독인들의 대부분은 역사의 희생자로서 다시 느끼고 있다. 통일은 구동독에 현대화 를 가져왔지만, (석탄 스토브 대신에) 난방장치를 가진 집, 전화기와 인터넷들은 확산된 사회의 침체를 지우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5 명중 1명의 구동독인은 실직상태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구동독 지역의 오늘날의 상황은 어떤가? 구동독 지역에는 단지 두개의 젊은 세대들의 움직임이있다라고 알려지고 있다: 하나는 라이트를 향한 것과 다른 하나는 서유럽을 향한 것. 이곳을 떠나지 않는 자는 공산주의 정부에 대한 향수와 독일인이 아닌 모두에 대한 혐오증의 혼합에 의해 정복당할 위험에 있다는 것이다. 구동독에서 타운와 마을은 멸종되어 가고 있고, 시민들은 대량으로 구서독으로 이주하고 있다. 구동독인들의 감정에는 독일에 속하지 않는다는 감정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은 “구서독인들은 우리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감정은 하나의 구멍을 만들고 이 구멍 안에 민족주의적 또는 인종차별주의적 경향들로 채울려고 하는 포풀리즘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구서독인들이 느끼는 통일에 대한 감정은 무엇일까? 구서독인들은 가난한 형제들에게 그들의 경제적, 금융적 도움의 관대함과 용기를 찬양하고 반복하고 있다. 재통합이후 오늘날까지의 독일 정부가 구동독 지역으로 보내준 도움은 약 1.5억 유로, 마샬 계획의 15배까지 이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빠른 통일의 이상은 하나의 커다란 실망 속으로 용해되었다. 숫자를 보자: 매년 독일 공화국은 구동독으로 국민총생산의 4%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구동독 지역은 50년대식의 경제적 기적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로서는 도로, 전화, 사회경제 기반시설과 도시의 복원이외에 투자와 원조의 대다수는 생산 활동이 아닌 소비에 지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예로서 결코 세금를 내지 않은 구동독의 펜션인 (pensioner)은 종종 구서독의 펜션인보다 더 높은 펜션을 받는다. 결정적인 문제는 모든 원조와 수여에도 불구하고, 구 동독인 지역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상황이고, 새로운 산업 현실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가 지불하고 있는데, 결코 충분하지 않는가”라고 구서독인들은 묻고 있다. 통일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 번째로는 경제적 측면이다. 서독은 매년 국민총생산의 4~4,4%를 구 동독의 주 (Länder)들에 쓰고 있지만, 구동독의 생활수준은 구서독보다 더 낮고 실직율은 거의 두 배이다. 두 번째로는 정신적이고 문화적 원인이다. 구소련 위성 블록에서 구동독은 특별한 특권을 누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로사 룩셈버그, 1919년에 스파르타쿠스의 봉기 동안에 베를린에서 암살된 칼 리브크네히트 (Karl Liebknecht)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구동독인의 자존심을 높여 주었다. 대학들, 과학 기관들, 리서치 센타들은 주목할 정도로 다른 위성 국가들 보다 더 낳았다. 하지만 오늘날 구동독 시민들은 구서독인들의 경험과 성공을 공유하지 못한 “가난한 친척”이라고 느낄 뿐이다. 세 번째로, 또다른 실수는 구서독은 통일 이전에 사회적 체제 (복지제도, 의료체체 ,학교와 대학) 를 개혁하지 않았고, 장벽 붕괴이후 구동독으로 그것을 수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통일의 심각한 실수는 평등을 무기한적이고, 불명확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똑같은 일에 대한 똑같은 보수을 받는 반면에 구동독에서의 일은 구서독보다 매우 덜 생산적 이다. 그 결과 많은 구서독의 투자는 폴란드 또는 슬로바키아로 가고 있다. 다섯 번째로, 정치는 통일에 대한 어떠한 성찰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통일의 공식적 연대순 배열에서 10월 9일은 잊어버려졌다. 맆시아는 또다른 천안문 학살로 변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국민이다. 폭력에 반대한다”라고 외치면서, 칠만명이 니콜라이 (Nikolai) 교회에서 출발했었다. 앞으로의 전망은? 구동독 체제는 시민의 권리를 무시했던 정권이었다. 장벽 붕괴의 20년이후 이 질문에 대해 독일은 공동의 대답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구동독 정권에서 행해졌던 비합법적 행위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여전히 미루고 있다. 어떤 동독인은 행복한 변호사가 되었지만, 많은 동독인은 실직 상태에 있는 상황이다. 혁명이 끝났을 때 혁명가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 자체의 꿈에 안주한 채로 남아 있는 자, 그 꿈을 개선하고자 하는 자, 과거 속에서 계속해서 움직이는 자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자로 나누어질 것이다. 세계 경제 침체는 구서독인들의 실직율 또한 증가시키고 있다. 다소나마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을 볼수 있는 것은 마지막 여론 조사에서 통일을 받아들이고 구동독인 (Ossis )또는 구서독인 (Wessis)이 아닌, 독일인이라고 느끼는 젊은이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나타난 것이다. 단지 14~19살의 젊은이들중 약 11%만이 구동독, 또는 구서독인으로 느낀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진짜 위험은 40~60 살의 세대는 독일 통일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경험과 비젼을 그들의 자식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Forsa 기관에서 최근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평균 7명중 1명 – 약 15% - 은 장벽이 세워졌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구동독인들이 느끼는 통일에 대한 감정은 무엇인가? 구서독인들에게 구동독인은 “구동독인중의 하나”로, 맆시아에서는 “우리들 (동독인)중의 하나”로서 취급되어진다는 것이다. 장벽 붕괴 당시 구동독인들은 구서독인들보다 더 진지했고, 더 집중적이었고, 아이러니를 모르고, 몹시 천진난만하게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독일의 통일에 대한 실망과 좌절은 당시의 반체제인사들 사이에서 강했다. 시위 행진의 영웅들은 자신들을 한 쪽에다 제쳐놓은 것에 씁쓸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통일의 과정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보취급을 당했다고 느끼고 있다. 구동독인들의 대부분은 역사의 희생자로서 다시 느끼고 있다. 통일은 구동독에 현대화 를 가져왔지만, (석탄 스토브 대신에) 난방장치를 가진 집, 전화기와 인터넷들은 확산된 사회의 침체를 지우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5 명중 1명의 구동독인은 실직상태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구동독 지역의 오늘날의 상황은 어떤가? 구동독 지역에는 단지 두개의 젊은 세대들의 움직임이있다라고 알려지고 있다: 하나는 라이트를 향한 것과 다른 하나는 서유럽을 향한 것. 이곳을 떠나지 않는 자는 공산주의 정부에 대한 향수와 독일인이 아닌 모두에 대한 혐오증의 혼합에 의해 정복당할 위험에 있다는 것이다. 구동독에서 타운와 마을은 멸종되어 가고 있고, 시민들은 대량으로 구서독으로 이주하고 있다. 구동독인들의 감정에는 독일에 속하지 않는다는 감정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은 “구서독인들은 우리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감정은 하나의 구멍을 만들고 이 구멍 안에 민족주의적 또는 인종차별주의적 경향들로 채울려고 하는 포풀리즘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구서독인들이 느끼는 통일에 대한 감정은 무엇일까? 구서독인들은 가난한 형제들에게 그들의 경제적, 금융적 도움의 관대함과 용기를 찬양하고 반복하고 있다. 재통합이후 오늘날까지의 독일 정부가 구동독 지역으로 보내준 도움은 약 1.5억 유로, 마샬 계획의 15배까지 이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빠른 통일의 이상은 하나의 커다란 실망 속으로 용해되었다. 숫자를 보자: 매년 독일 공화국은 구동독으로 국민총생산의 4%이상을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구동독 지역은 50년대식의 경제적 기적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로서는 도로, 전화, 사회경제 기반시설과 도시의 복원이외에 투자와 원조의 대다수는 생산 활동이 아닌 소비에 지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예로서 결코 세금를 내지 않은 구동독의 펜션인 (pensioner)은 종종 구서독의 펜션인보다 더 높은 펜션을 받는다. 결정적인 문제는 모든 원조와 수여에도 불구하고, 구 동독인 지역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상황이고, 새로운 산업 현실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가 지불하고 있는데, 결코 충분하지 않는가”라고 구서독인들은 묻고 있다. 통일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 번째로는 경제적 측면이다. 서독은 매년 국민총생산의 4~4,4%를 구 동독의 주 (Länder)들에 쓰고 있지만, 구동독의 생활수준은 구서독보다 더 낮고 실직율은 거의 두 배이다. 두 번째로는 정신적이고 문화적 원인이다. 구소련 위성 블록에서 구동독은 특별한 특권을 누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로사 룩셈버그, 1919년에 스파르타쿠스의 봉기 동안에 베를린에서 암살된 칼 리브크네히트 (Karl Liebknecht)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구동독인의 자존심을 높여 주었다. 대학들, 과학 기관들, 리서치 센타들은 주목할 정도로 다른 위성 국가들 보다 더 낳았다. 하지만 오늘날 구동독 시민들은 구서독인들의 경험과 성공을 공유하지 못한 “가난한 친척”이라고 느낄 뿐이다. 세 번째로, 또다른 실수는 구서독은 통일 이전에 사회적 체제 (복지제도, 의료체체 ,학교와 대학) 를 개혁하지 않았고, 장벽 붕괴이후 구동독으로 그것을 수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통일의 심각한 실수는 평등을 무기한적이고, 불명확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똑같은 일에 대한 똑같은 보수을 받는 반면에 구동독에서의 일은 구서독보다 매우 덜 생산적 이다. 그 결과 많은 구서독의 투자는 폴란드 또는 슬로바키아로 가고 있다. 다섯 번째로, 정치는 통일에 대한 어떠한 성찰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통일의 공식적 연대순 배열에서 10월 9일은 잊어버려졌다. 맆시아는 또다른 천안문 학살로 변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국민이다. 폭력에 반대한다”라고 외치면서, 칠만명이 니콜라이 (Nikolai) 교회에서 출발했었다. 앞으로의 전망은? 구동독 체제는 시민의 권리를 무시했던 정권이었다. 장벽 붕괴의 20년이후 이 질문에 대해 독일은 공동의 대답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구동독 정권에서 행해졌던 비합법적 행위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여전히 미루고 있다. 어떤 동독인은 행복한 변호사가 되었지만, 많은 동독인은 실직 상태에 있는 상황이다. 혁명이 끝났을 때 혁명가들은 무엇을 하는가? 그 자체의 꿈에 안주한 채로 남아 있는 자, 그 꿈을 개선하고자 하는 자, 과거 속에서 계속해서 움직이는 자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자로 나누어질 것이다. 세계 경제 침체는 구서독인들의 실직율 또한 증가시키고 있다. 다소나마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을 볼수 있는 것은 마지막 여론 조사에서 통일을 받아들이고 구동독인 (Ossis )또는 구서독인 (Wessis)이 아닌, 독일인이라고 느끼는 젊은이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나타난 것이다. 단지 14~19살의 젊은이들중 약 11%만이 구동독, 또는 구서독인으로 느낀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진짜 위험은 40~60 살의 세대는 독일 통일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경험과 비젼을 그들의 자식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Forsa 기관에서 최근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평균 7명중 1명 – 약 15% - 은 장벽이 세워졌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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