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국제 유럽

[블로그] 활력있는 여가시간을 위하여!

등록 2009-12-29 14:31

좀 뜬금없지만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사진이다. 사진 속 발의 주인공은 남편. 흙투성이 신발은 남편이 야외작업을 할 때 신는, 안에 강철보호대가 덧대어져 있는 특수신발이다.(남편은 지반의 강도 및 토양/수질오염 검사를 하는 회사에서 일하는데 절반은 사무실 업무, 절반은 야외작업을 한다.

남편이 이 직업을 택하기까지는 전공 부분도 있지만 사무실에만 앉아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매우 크게 작용했다.) 중요한 것은 오른쪽의 비닐봉투이다. 남편이 작업복과 신발 등을 구입한 작업용품점에서 가져온 것인데 겉에 써 있는 글귀가 가관이다. "활력있는 여가시간을 위하여!" 고로 이 상점에서는 일할 때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 여가시간에 필요한 물건을 판다는 소리다.

남편은 물건을 사고 이 비닐봉투를 건네받는 순간 또다시 게르만 정신 운운하며 놀려댈 와이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고 한다. 수 년간 독일사람들을 관찰하며 나는 '독일인은 이렇다, 혹은 저렇다'는 나름의 몇 가지 결론을 내렸는데, 그 중에 최고의 법칙은 바로 '독일인은 일하기 위해 휴가가 필요하다'이다.

고지식하고 다소 딱딱하고 정확하고 성실하기로 소문난 민족이 독일인이다. 그런데 가만히 관찰해 보면 그런 면이 이들을 참 친근하게 만든다. 너무 열심이고 진지한 점이 독일인에 대해 뭔가 '얘기할 거리'를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독일인들 스스로도 가끔씩 스스로에 대해 우스갯소리를 한다는 사실.

예전에 포르투갈 여행을 갔다가 어느 독일인 청년과 동행한 적이 있는데, 햇빛이 따가운 길을 두 시간쯤 산책한 후 기진맥진이 된 그가 한 말이 있다. "네가 뭘 잘 모르나본데, 게르만은 햇빛을 오래 견디지 못한단 말이다!" 산책이랍시고 수십 킬로미터씩 산행을 하고 여가를 고된 노동으로 보내는 강한 독일인들이 햇빛 앞에서는 죽도 못 쓴다는 말에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나는 지금껏 독일인처럼 부지런하고 힘이 남아도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주말에는 '이웃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잔디깎기 등 소음이 나는 작업이 금지되어 있는데, 내가 보기에 이런 규칙은 별로 필요없지 싶다. 어차피 다들 조깅을 하거나 주말농장을 돌보러 가고 집에 없을 테니 말이다.

주말에 우리집 베란다에서 강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프로페셔널한 레깅스에 스포츠 선글래스까지 끼고 유모차를 몰면서 조깅하는 아빠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한번은 강 건너편을 달리는 한 유모차 러너를 본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가 우리집 베란다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유모차를 밀고 있는데 내가 100미터 달리기하는 속도이다. 빨리 걸어도 20분은 걸리는 거리를 유모차까지 몰면서 그새 뛰어온 것이었다. 그 광경이 너무 진기해서 꼭 한 번 사진을 찍어두고 싶은데 매번 카메라 켜는 사이에 사라져 버려 실패했다.

어느 일요일에는 남편과 함께 집 근처로 산책을 나갔다. 주말에는 틀림없이 잔디깎기 금지인데 누군가 잔디 아니라 덤불을 전기톱으로 다듬고 있는 것이었다. 일요일인데 저렇게 소음을 내도 되냐고 묻자 남편 왈, '주말농장'에서는 괜찮단다. 여가활동의 일환이므로 주말에 그걸 누리겠다는 사람을 막을 이유는 없다. 그러니까, 집에 머무르는 주말에 집에서는 일을 할 수 없으므로 부러 주말농장까지 가서 일을 하는 셈인다.

독일에 놀러왔던 여동생이 자전거타고 하이델베르크 뒷산 꼭대기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들을 보고 했던 말이 딱이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인생을 저렇게 피곤하게 산대?"

독일의 개인주택에는 대개 차고가 딸려 있다. 이곳은 '차를 세워 두기 위한 장소'가 아니란 것을 내가 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시댁의 차고와 기타 몇 번 지나치며 엿본 차고들만 봐도 뻔했다. 온갖 나무판자니 연장들, 즉 '취미생활'을 위한 물건들이 그득하다.

독일에는 정기적으로 안 쓰는 물건들을 집 앞 거리에 내놓으면 시에서 나와 수거해가는 날이 있는데, 우리 남편 표현에 의하면 이날은 '차고 정리하는 날'이다. 온갖 널빤지와 낡아빠진 가구, 소파, 기타 고철 등이 쌓여있는 것을 보면 저 사람들은 대체 차고가 얼마나 크다는 소린지 참 궁금해진다. 그걸로 뭘 하는지도 궁금하다.

시댁에는 차고뿐 아니라 지하실에 작업장이 또 따로 있었다. 시아버님이 워낙 뚝딱거리는 것을 좋아하셨다고 한다. 크지 않은 이 작업장에는 목공소나 철물점 같은 데나 가야 볼 수 있을법한 온갖 기계와 연장이 그득하다. 남편과 시동생은 십대 때부터 이 온갖 희한한 물건들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대강도 아니고 나무 한 토막 자를 때도 1밀리까지 재고 선을 그어 자른다. 감탄한 내가 '자기 그거 어디서 배웠어?'하면 남편은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해, 라는 눈빛이다.

우리 집 맞은편에는 잔디깎는 기계 등을 파는 상점이 하나 있는데, 그 앞에 붙어 있는 포스터도 매우 상징적이다. 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의 신혼부부 중에 신랑이 커다란 연장통인지 잔디깎는 기계인지를 들고 있고 '(신혼)준비완료'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다. 모든 살림에 기본적인 연장과 기계는 생명이다. 우리집처럼 젊은 부부 달랑 사는 작은 셋집에도 그런 연장통과 드릴머신이 있으니 말 다했다.

최근에 나는 이렇게 투철한 독일인들의 활동정신과 탐구정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었다. 바로 아동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독일의 모든 어린이들이 수십 년 동안 애청해 온 두 가지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있는데, 'Sendung mit der Maus'(생쥐와 함께하는 방송)와 'Sesamstrasse'(깨거리)가 그것이라고 한다. Sesamstrasse의 주제가는 대략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이런 것을 묻지 않는 사람은 바보다, 세상에는 흥미로운 것이 수도 없이 많은데 이해를 하려면 때로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노래를 서너 살 때부터 배우니 독일 아이들의 탐구정신이 발달하지 않으면 이상하다.

Sendung mit der Maus는 매 회 다른 주제를 학문적으로(?) 다루는 방송이다. 빵이 어떻게 구워지는가, 레고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쓰레기는 어떤 과정을 거쳐 수거되는가 등이 수십 년 동안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이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진다. 남편은 심지어 체르노빌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대해서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배웠다고 한다. 일례로 레고 제작 과정 편의 링크를 걸어둔다. http://www.youtube.com/watch?v=-tqGZ8MuqGA

그래서 독일의 어린이들도 매우 '시스테마틱'하게 논다. 한번은 바닷가 모래사장을 거니는데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플라스틱 삽(플라스틱이라고 무시하지 말라. 독일 장난감은 강도에서 앞서간다)으로 모래성 주변에 수로를 파는 모습이 보였다. 동작이 어른 삽질 못지않게 절도있는 건 둘째치고, 수로도 대강 파는 게 아니라 모래성에서 바닷물까지 일직선으로 정확히 선을 그은 뒤에 그 선을 따라 삽질해 내려가는 것이었다. 말도 한 마디 없었고 심각한 눈빛은 삽끝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아이의 모습에서 나는 엄마와 함께 바닷가에 물장구치러 온 열 살짜리 평범한 사내아이의 모습을 도무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자랐으니 일주일 내내 일하고 주말에는 주말농장에 가서 가지치기라도 하거나 배터지게 먹은 성탄절 밤 열두 시에 조깅을 나가지 않고는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특히 기술과 관련된 쪽으로는 블랙홀이라서 간혹 남편의 호기심이 귀찮을 때가 있다.

한국에 갔을 때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기중기를 보고 그 원리를 꼬치꼬치 캐묻는 남편에게 버럭 짜증을 내기도 했다. 안내문에 나와 있는 대로 대강 설명해 주었더니 내 설명대로는 이 기계가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해를 잘못 한 모양이니 다시 읽고 설명해달라는 말에 Sesamstrasse를 보고 자라지 않은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나는 나중에 아이들이 뭘 물어보면 그냥 아빠한테 보낼란다고 그 무렵부터 작정했다.

글을 끝마치며 남편의 여가활용 정신이 낳은 결과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허리병을 앓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남는 시간에 남는 나무토막으로 만든 핸드메이드 랩톱 받침대이다. 다리 부분을 가만 보면 높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톱니까지 새겨 놓았다. 덕분에 요통이 훨씬 덜해졌으니 독일인들의 "활력 있는 여가" 활용 정신도 꽤 쓸모있는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독일의 기술력이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국제 많이 보는 기사

트럼프 ‘호주 관세 예외’에 일본 “우리 철강·알루미늄도” 기대감 1.

트럼프 ‘호주 관세 예외’에 일본 “우리 철강·알루미늄도” 기대감

‘누가 뭐래도 내가 실세’...트럼프 앉혀두고 오벌오피스에서 브리핑 2.

‘누가 뭐래도 내가 실세’...트럼프 앉혀두고 오벌오피스에서 브리핑

트럼프, 요르단 국왕에 대놓고 “미국이 가자지구 가지겠다” 3.

트럼프, 요르단 국왕에 대놓고 “미국이 가자지구 가지겠다”

D-30, 트럼프 철강 관세 실행 …BBC “한국도 영향 불가피” 4.

D-30, 트럼프 철강 관세 실행 …BBC “한국도 영향 불가피”

“이혼해도 가족”…데미 무어, 치매 브루스 윌리스 매주 찾아가 5.

“이혼해도 가족”…데미 무어, 치매 브루스 윌리스 매주 찾아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