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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블로그] 예수님도 못 건드리는 독일인의 휴가

등록 2010-02-09 15:05

술집에 아일랜드인과 덴마크인, 독일인이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예수가 문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너희들의 고통을 내가 치유해 주겠노라. 아픈 곳이 있으면 뭐든 말해 보라." 아일랜드인이 먼저 반색을 하며 나섰다. "저는 팔이 아파서 테니스를 못 치고 있사옵니다. 이 팔을 치료해 주소서." 예수가 그의 팔을 만지자 단박에 통증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덴마크인이 나섰다. "저는 목뼈가 아파 고생하고 있습니다. 목을 치료해 주소서." 예수가 그의 목을 만지자 이번에도 통증이 깨끗이 가셨다. 이를 보고 있던 독일인이 질겁을 하며 외쳤다. "나에게 손 대지 마시오! 병가가 아직 6주나 남았단 말입니다!"

독일인 하면 뭐가 생각나는가? 완벽주의, 정확성, 근면성, 논리적, 세계 최고의 기술력, 다소 근엄하고 딱딱한 인상?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니 부지런한 건 맞다. 집안이고 거리고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학력 여부를 떠나 다수 국민이 논리적으로 말을 잘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런 점은 표면상의 특성에 지나지 않는다. 위에 나열한 것 말고 독일인의 특징을 하나 더 꼽으라면 '휴가를 목숨같이 여긴다'는 점이다.

가만 보면 독일인들만큼 휴가에 벌벌 떠는 사람들도 없다. 어차피 취미랍시고 집에서 중노동할 거면서, 집에서 하는 일과 직장에서 하는 일은 다른가보다. 한번은 신문을 보던 시어머니가 유머란에서 각국의 국민성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내용을 보고 깔깔 웃으며 독일인에 관해 읽어주셨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독일인은 시속 300km로 달리는 포르쉐를 가졌다. 독일의 아우토반은 잘 정비되어 있으며 속도제한도 없다. 그러나 불행이도 휴가가 1년에 13주뿐이다." 잘 닦인 아우토반에서 포르쉐의 속도감을 즐기기에는 휴가가 충분히 길지 못하다는 얘기다.

13주 '뿐'이라고? 그러니 독일인이란 거다. 이들에게는 13주도 적다. 물론 이 얘기는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 공휴일을 제외한 유급휴가는 1년에 5~6주'밖에' 안 된다. 법정 연차휴가일수는 20일이지만 실상은 30일까지 주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남편의 회사는 매우 짠 편이라 25일인데, 물론 주5일 근무제에 평일만 계산해서 25일이니 실제로는 5주까지 휴가를 낼 수 있다. 게다가 독일은 주 평균 업무시간도 40시간이 못 된다. 회사 나름이지만 웬만해서는 칼퇴근이 철칙이다. 그밖에도 병가나 출산휴가 등에 무척 너그럽다 보니 이를 악용하는 사람도 많다.

수 년 동안 알고 지낸 주치의를 구워삶아 소견서를 받아내는 사람도 생각외로 많을 거라는 게 내 짐작이다.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셨던 시아버님은 언젠가 새로 채용한 여직원이 산휴를 남용해 애를 먹었다고 한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출산휴가를 내고 1년 동안 놀면서 월급을 꼬박꼬박 받다가(첫 12주까지는 급여의 100퍼센트, 이후 12개월까지는 어느 선까지에 한해 월급의 약 70퍼센트가 국가로부터 지급되므로), 휴가 끝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둘째를 낳는다고 또 산휴를 낸 것이다. 그 다음에 꾸준히 일을 했으면 괜찮은데 산휴 끝나고 돌아오자 마자 퇴사했다니, 산휴를 낸 직원의 자리를 보장해줄 의무가 있는 고용주 입장에서는 좀 어이 없는 일이다. 시아버님도 2년 동안 그 자리 지켜주느라 다른 직원을 채용하지도 못하다가 결국은 손해만 보신 셈이다.

뭐 다 이렇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노는 날은 독일인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햇볕 쬘 모래사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물론 북쪽에 모래사장은 있지만 햇볕은 좀체 보기 힘들다), 결론적으로 주말농장에 가서 덤불이라도 치며 병가를 보내는 일이 발생한다. 좀더 국제적인 사람들은 외국으로 나간다. 독일인은 세계 구석구석에 포진되어 있다는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카나리아 제도나 지중해의 유명 휴양지 모래사장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독일인, 카고바지에 탄탄한 트레킹화 차림으로 아프리카나 남미의 오지를 탐험하는 사람들도 독일인이다.(사족을 달자면 남미의 전설이 된 알렉산더 훔볼트도 독일인이었다. 이 말이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은 다니엘 켈만의 '세계를 재다'를 읽어볼 것.)

작년 봄에는 혼자 포르투갈 여행을 가서 어느 호스텔 도미토리 룸에 묵었는데, 그날 같은 방에 묵은 6명 중 5명이 독일인이었다. 그나마 외국인(?)인 나도 독일어를 할 줄 알아서 방 분위기가 참 화기애애했다. 지난 여름에는 남편과 사르데냐 섬에 가서 어느 종유석 동굴 가이드투어를 했는데, 이탈리아어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가이드가 그냥 영어로 진행을 했다. 그런데 실컷 영어로 설명하고 나오면서 보니 스웨던 남자 한 명과 나만 제외하고 죄다 독일인이었다. 더 웃긴 건 가이드도 독일인이었다는 사실.


말이 좀 주절주절 늘어졌지만 요는 첫째, 독일인은 노는 날에 목숨건다는 것(실제로도 노는 날이 많다), 둘째, 그래서인지 세계 어디를 가도 독일인 한명쯤은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인에게서 휴가를 빼앗느니 열흘 굶은 사자에게서 먹이를 빼앗는 편이 쉽다면 과장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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