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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07 18:47 수정 : 2005.07.07 18:47


△ (사진설명) 6일 스코틀랜드 글레이글스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초청 만찬에 참석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여왕에게 2012년 올림픽을 런던이 유치한 데 대해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다. 활짝 웃고 있는 블레어 총리와 굳은 표정의 시라크 대통령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글렌이글스/로이터 연합

2012년 개최지 놓고 블레어에 역전패
국민투표 유럽헌법 부결 등 잇단 악재

2012년 올림픽 개최지 경쟁에서 런던이 파리에 역전승을 거두면서, 신·구 유럽을 대표하는 토니 블레어(52) 영국 총리와 자크 시라크(72) 프랑스 대통령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렸다.

비를 맞고 파리시청 앞 대형 스크린 앞에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던 프랑스인들은 도버해협 건너 앵글로색슨에게 또다시 당했다며 경악했다. 예정됐던 축하파티는 모두 취소됐고, 비가 더욱 거세진 광장은 일순 텅 빈 광장으로 변했다. 일부 프랑스인들은 수적으로 우세했던 프랑스군이 대패해 나폴레옹이 포로로 잡혔던 “워털루 전쟁(1815년)의 재판”이라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200년전 프랑스함대를 대패시킨 해전을 기념한 트래펄가 광장에 모인 영국인들은 축제의 환희를 만끽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6일 주요8개국(G8) 정상회의가 열리는 스코틀랜드로 가는 전용기 안에서 소식을 전해듣고 망연자실해야 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따라나선 블레어 총리를 기세좋게 몰아붙이고, 지난달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프랑스의 농업보조금 문제 해결 없이 예산 분담금 환급에 대한 양보가 있을 수 없다며 버티는 블레어 총리를 “애처롭다”고 말할 만큼 그는 기세등등했었다. 피곤한 모습으로 특별기에서 내리던 시라크 대통령은 “올림픽위의 판단에 실망했다”면서도 “런던과 영국여왕, 영국 총리에 온마음으로 축하의 말을 전한다”고 말해야 했다.

반면 싱가포르 유치전에서 선수를 치고 스코틀랜드에서 선정 소식을 들은 블레어는 주변의 축하 속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주요8개국 정상회의 주최자임에도 만사를 제치고 3일부터 5일까지 싱가포르에서 30여명의 올림픽위원들을 상대하며 정력적인 유치활동을 벌였다. 시라크 대통령은 정치적 득실을 막판까지 따지다가 블레어가 휘젓고 떠난 5일에야 싱가포르에 도착해 하룻동안 뒷북을 친 꼴이 됐다.

아일랜드의 패트릭 하키 올림픽위원은 “블레어가 오지 않았다면 런던이 6~8표차로 졌을 것”이라며 “런던이 4표차로 이겼으니 결국 블레어 총리가 10~12표의 몫을 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 올림픽에서 프랑스에 승마 금메달을 안겼던 피에르 뒤랑은 “영국은 ‘구유럽’과 불화하면서도 미래를 지향하는 젊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총리를 가진 게 행운”이라며 유치 실패의 원인을 늙은 시라크에게 돌렸다.


올림픽 유치는 지난 5월 노동당 3기 연임이라는 국내정치적 기반을 닦은 블레어 총리보다는 최근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린 시라크 대통령에게 절실한 희망이었다. 사회당 출신의 파리시장과 공을 나눠갖는 한이 있더라도 싱가포르행을 막판에 선택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지난 5월말 국민투표에서 유럽헌법이 거부된 뒤 지난달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블레어 총리에게 일격을 당한 시라크 총리로선 반전이 필요했다. 최근 영국 음식에 대한 비하 발언으로 자존심을 세우긴 했지만, 그 역시 독이 됐다. 음식맛이 영국보다도 형편없는 나라로 꼽았던 핀란드의 올림픽 위원 2명은 런던에 찬성표를 던져 시라크에게 복수했다. 음식 문제에 대해 응대하지 않은 블레어 총리는 오히려 통큰 정치인으로 비쳐졌다.

6일 저녁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주최한 스코틀랜드식 만찬에 참석한 시라크 대통령의 굳은 얼굴은 블레어 총리의 환한 얼굴과 대조를 이뤘다. 7일 정상회의 개막에 맞춰 터진 런던 연쇄폭탄테러로 회의 일정이 차질을 빚고 대테러 문제가 우선적으로 논의되는 게 시라크로선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다. 아프리카 지원 등 의제를 선점한 블레어 총리의 독주를 지켜봐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뒷전으로 밀린 시라크 대통령은 이번 회의가 마지막 넘기 힘든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내몰린 자신의 말년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5공화국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오명 속에 3선의 꿈을 접고 ‘젊고 야심만만하기에 더욱 미워보이는’ 니콜라스 사르코지(50) 내무장관에게 대권 경쟁표를 넘겨줘야 하는냐를 자문하면서 오는 14일 혁명기념일에 대국민연설 문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류재훈 기자 hoon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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