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국제 유럽

“썩은 주검 널린 마을에선 개까지 총에 맞아”

등록 2012-07-10 19:47수정 2012-07-11 11:39

‘발칸 학살자’ 믈라디치 전범재판
무슬림 생존자 20년만에 눈물 증언
“임시감옥 창 밖에서 손을 흔들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꿈에 보여요. 작별인사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무서워서 못 갔습니다. 갔더라면, 그때 갔더라면….”

보스니아 무슬림인 엘베딘 파시츠(34)는 8일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법정에서 14살 때 진 멍에를 내려놓으며 눈물을 쏟았다. 그는 1992~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아버지와 친척, 이웃을 잃었다. 도륙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트라우마 속에서 20년을 버틴 그는 ‘보스니아 학살자’ 라트코 믈라디치(사진)의 전쟁범죄를 입증할 첫 증인이 되어 법정에 섰다.

파시츠의 가족은 보스니아 북부 흐브라차니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무슬림이었던 그는 “크로아티아·세르비아계 이웃들과 함께 농구, 축구도 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992년 봄 내전이 시작되면서 평화는 끝이 났다. 마을을 접수한 세르비아군은 무슬림 성직자를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 가족들과 도망쳤던 그가 몇달 뒤 돌아왔을 때 집과 마을은 완전히 불탔고, 곳곳에 부패된 주검들이 널려 있었다. 그가 애타게 찾던 개마저도 목줄이 묶여 있던 상태 그대로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파시츠도 결국엔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임시감옥이었던 학교에 수감됐다. 150여명의 남성들은 위층에, 여성과 어린이 몇몇은 아래층에 갇혔다. 남성 수용소에 있던 파시츠에게 아버지와 삼촌은 “일어나서 엄마한테 가라, 너는 살 것”이라며 등을 떠밀었다. 파시츠는 그렇게 목숨을 건진 마지막 소년이 됐다.

다음날 여성과 어린이들은 버스에 태워져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남자들은 학교에 남았다. “존경하는 판사님, 그날 밤 이후 저는 (학교에 남은) 그들 모두가 죽었다는 데 한점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파시츠는 세 명의 판사들 앞에서 목메는 소리로 증언을 이어갔다.

아버지를 뒤로 하고 버스로 이동하면서 파시츠도 두들겨 맞고 학대당했다. 그는 검은 옷을 빼입은 한 나이든 여성한테 붙잡혀 칼로 협박당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 여성은 ‘내 아들 중 한 명이 죽었으니, 나에게 발리아(보스니아 무슬림 경멸 용어) 한 놈을 죽일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다”고 파시츠는 전했다.

지난 5월16일 처음 시작된 믈라디치 재판은 검찰의 실수로 이틀만에 무기한 연기됐다. 검찰이 수천 쪽에 이르는 증거자료를 사전에 믈라디치 변호인에게 공개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믈라디치는 다만, 내전이 시작되기 전 보스니아 무슬림과 세르비아·크로아티아계의 사이가 좋았다는 파시츠의 증언을 듣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날 증언에서 예상과 달리 파시츠가 어떻게 다민족 보스니아가 전쟁에 내던져졌고, 사이좋은 이웃들이 불구대천의 적으로 변해갔는지 만천하에 드러내는 동안 믈라디치는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재판 내내 돌처럼 굳은 얼굴로 전면을 주시한 채 앉아 있었다.

전 세르비아 군 총사령관 믈라디치
전 세르비아 군 총사령관 믈라디치
당시 세르비아군 총사령관이었던 믈라디치는 유고전범재판소 법정에 끌려간 마지막 최고위급 용의자다. 믈라디치는 8천여명의 무슬림 학살 등 11개의 반인도주의 및 전쟁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유죄가 확정될 경우 최대 종신형에 처해질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와 유족들은 재판이 너무 길어지면 심장병을 앓고 있는 믈라디치가 유죄판결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전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박지성 아버지 “맨유는 마지막까지 박지성 이적..”
“한국경찰에 출동요청했다”는 미군진술은 거짓이었다
“썩은 주검 널린 마을에선 개까지 총에 맞아”
박근혜 “불통이라는 말은 별로 들은 기억이 없다”
[화보] 검찰 소환 이상득, 계란 세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국제 많이 보는 기사

트럼프 ‘호주 관세 예외’에 일본 “우리 철강·알루미늄도” 기대감 1.

트럼프 ‘호주 관세 예외’에 일본 “우리 철강·알루미늄도” 기대감

‘누가 뭐래도 내가 실세’...트럼프 앉혀두고 오벌오피스에서 브리핑 2.

‘누가 뭐래도 내가 실세’...트럼프 앉혀두고 오벌오피스에서 브리핑

트럼프, 요르단 국왕에 대놓고 “미국이 가자지구 가지겠다” 3.

트럼프, 요르단 국왕에 대놓고 “미국이 가자지구 가지겠다”

D-30, 트럼프 철강 관세 실행 …BBC “한국도 영향 불가피” 4.

D-30, 트럼프 철강 관세 실행 …BBC “한국도 영향 불가피”

“이혼해도 가족”…데미 무어, 치매 브루스 윌리스 매주 찾아가 5.

“이혼해도 가족”…데미 무어, 치매 브루스 윌리스 매주 찾아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