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 전 총리 무엇을 남겼나
“영국병 고치겠다”며 11년간 집권
80년대 중반 경기회복 성공하지만
제조업 포기로 실업자는 더 늘어 독단적 행태로 사회 결속 무너져
인두세 도입…당내 반발로 퇴진
모교도 관례적 ‘명예박사 수여’ 거부 “그의 유산은 공공의 분열, 개인적 이기심, 탐욕의 숭배였다. 이 모든 것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 정신을 속박했다.” 영국 <가디언>은 8일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사망에 대한 사설에서 그의 통치와 유산으로 영국의 공동체 정신이 말소되고, 불필요한 분열과 갈등의 시기를 보냈다고 혹평했다. 1980년대 이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함께 세계적인 신보수주의 혁명을 이끈 대처의 죽음과 함께 ‘대처리즘’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전 세계를 힘겹게 만들고 있는 금융위기의 근원도 대처가 남긴 유산이다. ■ 대결과 갈등의 정치 “나는 합의의 정치인이 아니다. 나는 확신의 정치인이다” 대처의 집권시절은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심각하고 빈번한 폭동의 시기였다. 대처가 자신을 표현한 위의 발언이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1979년 11월 집권한 대처가 물려받은 비대한 노조권력 등 영국의 상황은 분명 치유해야 대상이기는 했다. 당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던 독일이나 북유럽 나라들은 사회적 결속을 깨지 않고 경제 회복과 역동성을 회복했다. 반면, 대처의 치료법은 영국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줬다. 같은 보수당인 데이비드 캐머런 현 영국 총리도 “대처는 가장 위대한 평화시대의 지도자”라고 평가하면서도, 그가 여론을 분열시켰다고 지적했다. 대처의 전기작가이자 <가디언>의 칼럼니스트였던 휴고 영은 대처가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들을 열거하면서, 이런 사건들 탓에 대처 이후 영국 정부는 사회통합을 위해 애쓰게 됐다는 분석을 남겼다. 대처가 외교적 해결을 반대하면서 강행한 포클랜드전쟁의 “놀라우면서도 멍청한 승리”, 이 전쟁 덕을 본 그의 두번째 총선 승리와 총리직 취임, 신자유주의 사상의 정책화와 집행, “작은 정부가 아니라 시장을 보호하려는” 강력한 정부 운용으로 인한 분쟁의 일상화, 불공정한 인두세 도입과 유럽연합(EU)과의 갈등이다. “대처는 이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밀어붙였고, 이는 그의 몰락을 부르고 영국의 사회적 결속을 와해시켰다”고 영은 지적했다. 결국 대처는 전후 가장 장수한 총리의 말로로는 어울리지 않게 사실상 보수당에서 축출돼 정계를 떠나야 했다. 자산소유자에게 징수하던 지방정부의 재산세를 대처가 일방적으로 모든 주민에게 부과하는 인두세로 변경해 버리자, 마지막 남은 충복인 제프리 호우 당시 부총리마저 등을 돌렸다. 호우의 사임을 부른 내각회의에서 “대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제프리에게 무례하게 대했다”고 참석자들은 증언했다.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다른 ‘대처 리더십’의 실상이 폭로된 것이다. 곧이은 당수 선거에서 대처는 주위의 압력으로 도중 하차해, 배신감으로 인한 눈물을 보이며 총리 관저를 떠나야 했다. 극작가이자 대처의 연설담당관이던 로널드 밀러는 “대처는 극단적인 감정을 자극했다. 그는 이성적인 사람에게 거의 폭력적인 적의를 자아냈다”고 평가했다. ■ 영국 경제의 양극화 영국 경제를 되살렸다는 게 대처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논란은 많다. 그의 집권은 불황으로 시작해, 불황으로 끝났다. 1979년 11월 집권한 대처는 1980년 초 성장률이 -4%까지 떨어지면서 1930년대 대공황에 준하는 불황을 겪다가, 80년대 중후반 성장률이 7% 가까이 오르는 경기회복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가 총리에서 물러난 1990년 영국은 성장률이 1%를 밑도는 불황에 다시 빠졌다. 그의 집권 기간 연평균 성장률은 2.3%로 전후 평균에 못미친다. 더 큰 문제는 경제의 양극화다. 계층간, 지역간 양극화가 극심해졌다. 1980년대 중반의 경기회복은 런던과 영국 동남부 지역에 집중됐다. 주택경기 호황과 북해 유전 개발에 따른 투기적인 가구소비 증가에 기댄 것이다. 모든 제조업을 사실상 포기하고, 런던의 금융산업만을 육성한 정책으로, 영국의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에 영원한 산업공동화라는 상처를 남겼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강조했다. 경기회복 시기에도 실업자는 더욱 늘어, 집권 초기 150만명에서 그 두배인 300만명으로 증가했다. 계층간 불평등의 심화는 금융산업 육성을 명분으로 한 규제완화와 조세제도 개편의 결과였다. 그는 자신의 사임을 부른 인두세를 추진하는 등 조세 부과 기준을 소득과 자산에서 소비로 바꾸었다. 소득세율이 낮아졌음은 물론이다. 대처의 경제정책이 영국을 짓누르던 부담을 어느 정도 완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실의 대부분은 부자에게 돌아가고 부담은 급등한 부동산 가격과 고물가에 시달리는 저소득층이 지게 됐다는 비판이 많다. 모교 출신 총리에게 관례적으로 명예박사학위를 주던 옥스포드대학은 대처에게는 이 학위 수여를 거부했다. <가디언>은 “대처가 씨름한 전후의 실패한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그의 실패한 해법으로 돌아가서도 안 된다”며 “그의 무덤 앞에서 춤을 춰서도 안 되지만, 그의 국장을 치르지 않는 것도 옳은 일이다”라고 평가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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