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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영국 서민은 왜 한달에 한번도 축구경기를 볼 수 없나

등록 2013-08-08 20:18수정 2013-08-11 11:43

“솔직히 말해. 공부는 핑계고, 축구 보려고 영국 가는 거지?”

지난해 유학을 떠나올 때 지인들에게서 열번은 넘게 들은 말이다. 한국에 있을 때, 주말이면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경기를 한편씩은 챙겨봤고, 축구 팬임을 숨기지 않았던 탓이다. 내심 기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축구 종가’에 왔으니 아무래도 뭔가 다르려니 기대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었다. 축구장에는 지난 1년이 넘도록 한번도 못갔고, 축구 중계는 지금껏 열 경기도 못봤다. 벌이가 없는 유학생이 범접하기에 축구는 영국에서 너무 비싼 유흥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자본에 잠식당한 축구시장
2011~2012년 시즌 매출 5조원 기록
경기 불황에도 구단들 승승장구
잇따라 구단 사들인 세계 갑부들은
축구장을 초대형 ‘도박판’으로 바꿔

영국에서 축구는 단순히 스포츠 종목을 넘어 불붙은 성장산업이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영국 경제가 불황 속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에도 축구 구단들은 승승장구했다. 지난 6월 컨설팅업체인 딜로이트에서 내놓은 자료를 보면,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20개 구단은 2011~2012년 시즌 동안 29억유로(5조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앞선 해에 견줘 16%나 늘어났다. 유럽 리그 가운데 둘째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독일 분데스리가(19억 유로)를 한참 앞섰다.

뛰어오르는 텔레비전 중계권료를 보면, 프리미어리그의 활황을 실감할 수 있다. 딜로이트 컨설팅의 자료를 보면, 2013~2016년 프리미어리그의 영국 국내 중계권은 무려 34억파운드(5조8000억원)였다. 2010~2013년에 견줘 71%나 비싸졌다. 프리미어리그의 인기가 영국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세계 200여개국에 방송되는 중계권도 2013~2016년에 22억파운드(3조8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3년 전보다 50%나 늘어난 액수다.

호황을 누리는 영국의 축구 시장을 거대 자본이 놓칠 리 없다. 미국과 러시아, 중동의 갑부들이 프리미어리그 구단을 사들였다. 이 가운데 미국 자본은 메이저리그 등을 운영한 방식을 적용해 ‘수익 극대화’ 전략을 주로 선택했다. 미국인이 대주주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아스널, 리버풀이 여기에 해당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러시아나 중동의 갑부들이 오일 머니를 축구장에 쏟아 부었다.‘돈이 남아도는’이들 구단주들은 거대한‘판돈’을 걸어 축구장을 초대형 도박판으로 변모시켰다.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가 그랬다. 특히 지난 2003년 첼시를 사들인 러시아의 신흥 재벌 아브라모비치는 10년 동안 선수 영입에만 7억파운드(1조2000억원)를 쏟아부었다. 또 2008년 맨체스터 시티를 사들인 아랍에미리트의 왕자인 셰이크 만수르는 한술 더 떴다. 불과 5년 사이에 5억파운드가 넘는 돈을 선수 영입에 투자했다.

‘큰 손’들의 투자가 이어지자 축구 선수들의 몸값도 뛰어오르고 있다. 올해 여름 선수 이적 가운데 5000만파운드가 넘는 거래만 벌써 세차례나 이뤄졌다. 이적설이 오가고 있는 토트넘의 공격수 가레스 베일의 몸값은 1억파운드(1700억원)가 넘게 평가됐다. 2009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할 당시 몸값 8000만파운드를 훌쩍 넘어서는 수준이다. 일부 선수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의 연봉은 2011~2012년 시즌에 4%나 올랐다. 영국이 극심한 경기 침체를 앓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스널의 감독 아르센 벵거는 이달 초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선수들의 몸값을 두고“세계 축구계가 미쳐가고 있다”고 한탄했다.

노동계급에겐 너무 비싼 유흥
4만~21만원 하는 비싼 입장료는
노동계급 팬층을 중류·상류로 대체
TV중계 시청료도 한달에 7만5천원
서민들 간간이 펍이나 찾을 수밖에

문제는 축구 시장의 팽창이 정작 오랜 팬층인 영국 노동계급을 점차 소외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축구가 전통적으로 하류계층 또는 ‘워킹 클라스’ 즉 노동자 계급의 스포츠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리버풀 축구팀의 오랜 팬인 이에스틴 윌리엄스 버밍엄대 교수(사회정책학)의 농담 섞인 설명을 빌리자면, 영국 스포츠는 하류층의 축구와 럭비, 중산층의 크리켓과 테니스, “저 멀리 높이 있어 지상에 발을 딛지 않는” 상류층의 승마, 폴로로 나뉜다.

축구가 노동계급에서 멀어지는 징후는 크게 두가지 현상에서 읽을 수 있다. 첫째는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축구장 입장료다. 지난 6월19일 런던 한복판 대로변에서 진기한 시위가 벌어졌다. 라이벌 구단인 리버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널과 토트넘의 팬들로 이뤄진 400명이 넘는 시위대의 요구는 간단했다. 축구장 입장료를 제발 좀 낮추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손에 들린 플래카드는 “노동자들의 게임, 부자들의 입장료” “축구장에서 탐욕을 몰아내자” 같은 문구를 담았다. <가디언>에 소개된 구단들의 입장료를 보면 축구팬들의 심정이 이해될 만도 하다. 첼시의 홈구장인 ‘스탠포드 브릿지’에서는 선수들의 얼굴도 잘 안 보이는 가장 구석자리 좌석의 입장권도 41파운드(7만원)다. 필자가 있는 지방 도시인 버밍엄에는 아스톤빌라 축구팀이 있는데, 여기 홈구장에서 그나마 가장 싼 입장권도 20파운드(3만4000원)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상업화를 분석한 미국 하버드대의 연구자 샘 듀발은 지난 2010년 쓴 <축구의 신자유주의화>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세계적인 축구팀으로 도약하자, 팬들은 점차 서포터에서 소비자로 변화하도록 강요받았다. 이 변화의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노동계급인 팬층은 점차 중류 또는 상류계층으로 대체됐고, 여기에는 종종 비싼 입장료가 한몫 했다.”

둘째, 비싼 스포츠 채널도 높은 진입 장벽이 됐다. 축구장에 못가면 경기 중계라도 볼 법도 하지만, 프리미어리그 중계방송은 아무나 보기 힘들다. 프리미어리그를 중계하는 ‘비스카이비 스포츠 채널’의 시청료가 한달에 42.5파운드(7만5000원)이기 때문이다. 고화질로 보려면 여기에 달마다 1만원씩의 추가요금이 붙는다. 서민이 감당하기에 부담스러운 액수가 따라붙은 이유는 영국의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이 일찌감치 수조원씩 쏟아부어 중계권을 사들인 때문이다. 이 채널의 유료 가입자는 1000만명이 약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인구를 제외한 대다수의 서민들은 집에서 축구를 보지 못한다. 막대한 이익을 챙기며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유료 채널의 횡포에 알렉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도 단단히 골이 났던 모양이다. 그는 지난 2011년 <비비시>(BBC) 인터뷰에서 “악마와 손을 잡았으면 대가를 지불하는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은 이미 신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6월 축구팬들의 시위에서 등장한 구호 가운데 하나도 “우리는 스카이 채널을 증오하다”였다.

김기태 영국 버밍엄대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김기태 영국 버밍엄대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수익 극대화를 노리는 스포츠 재벌과 방송 재벌의 틈에서 영국 노동자들은 결국 경기장에도 갈 수 없고, 집에서 축구 중계도 볼 수 없는 신세가 됐다. 고작 가까운 펍을 찾아 맥주를 홀짝이며 축구 중계를 보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맥주도 공짜는 아니다. 지난 2월 영국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영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2009년 이래 계속 떨어져 지난 2003년 수준으로 도돌이표를 그렸다. 영국 노동자들에게 드리운 불황의 그림자와, 날로 번창하는 축구시장의 불빛 사이의 명암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는 셈이다. 오는 17일에는 프리미어리그의 새 시즌이 시작된다. 한국 텔레비전 중계 화면이 비추는 프리미어리그 축구장 관중석에서, 이제는 영국 서민의 모습을 찾기는 더욱 힘들 것이다. 벌이가 없는 유학생도 축구장에는 갈 엄두를 못내고, 간간이 펍이나 찾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버밍엄/김기태 영국 버밍엄대 사회정책학 박사과정limpid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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