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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등록금 15년새 0원에서 1500만원…“계층이동 사다리 찼다”

등록 2013-09-12 20:18수정 2013-09-13 08:31

*1500만원: <연간 상한선 9000파운드>

하늘로 치솟는 영국의 대학 등록금
대학 무상교육 1998년 폐지…정부·일부 대학들 의기투합 폭등사태 빚어
학비부담에 작년 대학 응시생 12% 줄어…소수인종·저소득층 입시차별도
영국 버밍엄대 사회정책학과의 막내 교수인 로스 밀러가 2000년대 초에 대학을 졸업했을 때, 그의 은행 잔고에는 1만2500파운드(2100만원)의 빚이 쌓여 있었다. 학부 시절 등록금과 생활비의 일부를 대출로 채운 결과다. 5년 전 대학에서 일자리를 잡은 뒤부터 그는 계속 빚을 갚아나가고 있다. 정부가 지원하는 대출 프로그램은 그나마 이자율이 낮았다. 한달에 160파운드씩 갚아나가면 5~6년 뒤에는 원금까지 모두 갚을 듯하다. 그는 “지금 대학생들에 비하면 운이 아주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럴 법도 하다. 밀러 교수의 학부 시절 등록금은 1년에 1000파운드(170만원)에 불과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영국 대학 신입생의 등록금은 8000파운드를 훌쩍 넘는다. 그 사이 영국의 대학 등록금이 무려 9배나 뛰었기 때문이다. 물가 인상분을 고려해도 혹독한 수준이다.

1990년대와 비교하면 변화는 더욱 극적이다. 영국의 대학교육은 1997년까지 무상이었다. 변화는 노동당 정부에서부터 시작됐다. 1997년 5월 집권한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권은 1998년 가을부터 대학들이 입학생들한테 1년에 1000파운드까지 등록금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명분은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는 정부의 재정 지출을 줄이자는 것이었고, 둘째는 대학들의 수입을 늘려서 이른바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등 일부 명문 대학들이 등록금 제한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나려고 정부를 한참 압박한 결과였다. 물론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다. 노동당의 정치인인 켄 리빙스턴 같은 이들은 “계급 이동을 위한 사다리를 차버리는 짓”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비판 여론 속에서도 등록금은 야금야금 계속 올랐다. 2009년에는 등록금 상한선이 연간 3225파운드까지 뛰었다.

2010년 11월, 등록금 인상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해 선거에서 승리한 영국의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정권은 충격적인 정책을 발표했다. 2012년 가을부터 영국 대학의 등록금 상한액을 기존의 3290파운드에서 9000파운드로, 세배 가까이 올리겠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초 정부의 의뢰를 받은 민간 조사단이 영국 대학 등록금 상한을 아예 없애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을 때만 해도 여론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보수당과 연립정권을 이룬 자유민주당이 그해 봄 총선에서 내놓은 대표 공약 가운데 하나가 대학 등록금 철폐였다. 거짓 약속으로 집권에 성공한 정당은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반대의 극단에 섰다.

정부가 제시한 등록금 기준은 어디까지나 상한선이었지만 시장에서는 ‘정가’로 받아들였다. 전국에서 60곳이 넘는 대학들이 2012년 가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연간 9000파운드의 등록금을 물리기 시작했다. 영국 대학 총장들의 모임인 ‘유니버시티즈 유케이’가 최근에 내놓은 자료를 보면, 2012년 전국 평균 대학등록금은 1년에 8385파운드였고, 올해에는 평균 8500파운드를 넘을 것으로 어림됐다.

가파르게 오르는 등록금은 물론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2010년 11월 전국의 거리는 학생들의 항의 시위 물결로 뒤덮였다. 그해 11월24일 런던에서 벌어진 시위에서는 학생 41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시민사회의 이런 반발에도 아랑곳않고 당시 영국 의회는 등록금 상한 인상안을 가결했다.

이쯤 되면 궁금할 법도 하다. 영국의 시민사회가 어떻게 이토록 무모하고 과격한 정책을 결국 수용했을까. 대략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우선, 정부는 등록금 인상에 상응하는 지원금이나 대출 제도를 어느 정도 내놓았다. 실제로 빈곤층 자녀의 경우에는 등록금은 물론 생활비에 대해서도 전액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물론 그 액수가 대부분 고스란히 부채로 돌아오지만, 졸업 이후 연봉이 2만1000파운드(3600만원)를 넘기 전까지는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 만약 평생 저소득층으로 남는다면? 부채는 사라진다. 이런 ‘조삼모사’식의 정책을 들고 정부는 이렇게 그럴듯하게 선전했다. “적어도 대학을 다니는 동안은 무료로 다닐 수 있으므로, 앞으로 더 많은 빈곤층 출신 학생들이 대학에 다닐 수 있다.” 개그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영국의 부수상인 닉 클렉이 2010년 <비비시>(BBC)에 나와서 정색하고 한 말이었다.

둘째, 영국 교육 분야의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원하는 세력들이 등록금 인상을 지지하고 나섰다. 당시 <파이낸셜타임즈>는 사설을 통해 “(등록금 상한을 없애려는 구상은) 매우 급진적이며, 영국 대학교육 분야에 자유시장 원리를 적용시키는 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두 손 들어 환영했다. 종합하면, 시장론자들과 재정 지출 축소를 원하는 정부, 그리고 수익 증대를 통해 대학 재정을 살찌우려는 일부 명문 대학들이 등록금 인상이라는 지점에서 의기투합했다.

2012년부터 대학 등록금을 한꺼번에 세배로 올린 정부 정책은 대학의 진입 장벽을 높였다. 지난 1월 <비비시>의 보도를 보면, 2011~2013년 사이에 대학 응시자의 수가 무려 12%나 줄었다. 2009~2011년 사이 대학 응시 인구가 16% 가까이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하락세는 더욱 두드러진다. 2년 사이에 4만명이 넘는 젊은이가 대학 문턱에서 좌절하거나 다른 선택을 한 것으로 추산됐다.

등록금 인상 때문에 저소득층이 교육에서 소외된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정부는 정부독립기관인 ‘공정한 교육 기회를 위한 사무국’을 설치하기도 했다. 사무국의 레스 엡돈 대표는 지난달 “대학들이 수익을 늘리려고 저소득층 학생들의 선발을 기피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대학들은 수익을 극대화하려고 중산층 이상 가정의 아이들을 뽑는다. 학부모들이 돈을 대주니까, 저소득층 아이들과 달리, 중산층 이상 아이들이 자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차별은 은밀했지만, 통계마저도 속일 수는 없었다. 영국 더럼대학 사회정책학과 비키 볼리버 박사의 연구를 <가디언>이 소개한 내용을 보면, 영국의 명문대학들이 소수 인종과 저소득층 지원자들을 차별해온 정황이 드러났다. 1996~2006년 사
김기태 영국 버밍엄대학교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김기태 영국 버밍엄대학교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이 4만9000건의 대학 지원자 표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를 보면, 영국의 상위 24개 대학에 합격한 흑인과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계 학생들은 대입 성적이 백인 학생보다 평균 한등급 높았다. 같은 성적을 얻으면 백인 학생이 합격했다는 의미다. 또 저렴한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고액의 사립고등학교 졸업생보다 두 등급 높은 성적을 거둬야 명문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됐다. 볼리버 박사는 “대학 입학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대학 입학 과정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201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놓은 자료를 보면, 영국은 비교 대상 12개 회원국 가운데 계급 이동성이 가장 낮은 나라로 분류됐다. ‘불평등의 나라’ 미국보다도 더 심각했다. 영국 교육계의 신자유주의적인 변화는 이런 추세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영국의 계급사회는 부익부 빈익빈의 동맥경화에 시달리고 있다.

버밍엄/김기태 영국 버밍엄대학교 사회정책학 박사과정 limpid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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