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9.01 19:55 수정 : 2006.04.15 12:28

피셰크슈트라세 주거공동체에서 33년째 살고 있는 롤란트 하르트만(61)과 크리스티나 하르트만(53) 부부는 자신들의 시도가 “잃은 것보다 얻은 게 훨씬 많았다”고 얘기한다. 슈투트가르트/한귀용 통신원

‘아버지 권위’ 가족 버리고
형제 구별 없이 공동육아 등

1968년을 전후해 독일의 정치, 사회, 철학, 교육, 문화 등 기성제도 전반에 도전했던 '68세대'의 주역들이 슈투트가르트 시내 피셰크슈트라세의 한 지붕 밑에서 30년 이상 주거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주거공동체 일원인 롤란트 하르트만(61·컴퓨터업)은 “우리는 다르고 싶었다. 우리는 모든 금기시되던 것을 깨고 싶었다”고 68운동을 회상한다. 반권위주의적인 68세대에게 가족은 아버지라는 권위를 중심으로 한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제도였다. 이를 대신하는 가족 형태를 추구한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주거 공동체를 만들었다.

1970년 만들어진 피셰크슈트라세 주거공동체도 그 가운데 하나다. 많을 때는 8가구 30명이 함께 살았다. 현재는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킨 하르트만과 베르너 슈타프(65·사회교육자)와 불프 리데(63·판사)의 세 부부만이 함께 살고 있다.

피셰크슈트라세 주거공동체는 이념이나 정치 목적보다는 현실적인 필요에 기반을 둔 공동생활을 추구한다. 수영장이 딸린 정원 등 넓은 구조도 주거 공동체가 지속할 수 있었던 기본 요소였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도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 게 특징이다. 함께 살지만 사생활을 간섭 받지 않을 개인 방들이 있었다.

자본주의 가족형태를 부정하고 생겨났던 코뮨과 다르다. 1967년 베를린에 자본주의의 가족형태를 부정하는 코뮨1이 만들어진 이후 쾰른, 베를린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여러 코뮨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금기시하던 그룹섹스, 동성애가 코뮨의 일반적 특징으로 언론에 집중 부각되면서 코뮨은 대중의 지지도를 잃고 사라져갔다.

“히피운동에 뿌리를 둔 코뮨은 성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주거공동체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 재정 문제에서도 모두 평등이란 기치 아래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주거공동체는 넓은 의미의 대가족과 같은 형태이지만, 혈연이 아니라 대안적인 가족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재정 문제도 공동지출 부분 외에는 각자 관리한다. 우리 주거 공동체에선 역할 바꿈이 있긴 하지만, 섹스 파트너 바꿈과 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쇼핑을 좋아하는 아내 크리스티나(53)가 시내로 쇼핑 나갈 땐 같은 취미의 불프가 기꺼이 함께 가주었다.”

코뮨과 달리 30년 넘게 오래 지속된 이유도 이런 차이에 있다고 하르트만은 강조한다. 셰크슈트라세의 주거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었던 힘은 이처럼 “어울려 사는 것에 대한 필요”를 공유했던 데 있다. 함께 살기를 원했고, 아이들은 친형제처럼 지냈다. 슬픔과 즐거움도 함께하면서 공동체적 운명을 공유했다. 집 밖에 정치적 구호의 플래카드를 내걸 때는 전체 토론을 거쳐 결정했다. 싫어하는 구성원에게도 강요는 없었다.

피셰크스트라세 사람들은 ‘킨더라덴’이라는 대안유치원 형태의 어린이집을 만들어 반권위주의적인 유아교육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르트만과 불프네는 1972년 슈투트가르트 시내 보트낭에 이런 어린이집을 처음으로 만들면서 공동체에 합류했던 이들이다.


피셰크슈트라세 주거공동체 부모는 아이들에게 ‘집단주의’나 ‘권위’를 강요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의 형제인지도 구별하지 않는다. 늦은 밤 시간까지 마당에서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발가벗고 정원을 뛰어 다니는 것도 보통이었다. 폭력도 금기 사항이다. 남자들도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하르트만의 부인 크리스티나(53)는 피셰크슈트라세 남자들은 모두 요리와 청소를 잘 한다고 자랑한다.

가족 간의 평화와 조화가 화장실 청소나 부엌의 청결보다 항상 우선이었다. 손님들이 엉망으로 어질어진 집안을 보고 “꼭 돼지우리 같다”고 말할 때 피셰크슈트라세 아이들은 “우리 집은 15명의 돼지가 청결하게 살 만큼 충분히 깨끗하다”고 당당하게 대답할 만큼 당돌했다. 아이들은 놀아줄 친구가 없어서 심심했던 적이 없었다. 부부가 함께 외출하는 경우 아이를 따로 돌볼 보모를 구할 필요도 없었다.

주거공동체는 일찌감치 생태주의 실천에도 앞장섰다. 10km나 떨어진 유기농 농장인 데메터농장에서 1주일에 두 차례씩 우유와 계란을 갖다가 이웃들과 나누었다. 1주일에 두 차례 직접 빵을 굽고, 양털 실로 옷을 짜서 입기도 했다. 원자력발전소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전기료 안내기 운동을 벌였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에 불프는 약품을 보내기 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주거공동체는 미혼모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70년대 독일에서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방을 얻기도 힘들었다. 피셰크슈트라세 주거공동체선 그동안 2명의 미혼모와 5명의 아이들이 따뜻한 가족으로 있다가 분가했다.

피셰크슈트라세 사람들의 이런 남다른 실천은 경찰의 불필요한 관심을 사기도 했다. 주변에서도 개인이 아닌 ‘피셰크슈트라세 사람들’로 불리기도 해 “때론 힘들기도 했지만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며 하르트만은 공동체 생활을 평가했다.

“처음에는 공동체 회의에서 누가 쓰레기를 치울 것인지, 집수리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등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결정했지만 점차 그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는 각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서로 알고 있고, 스스로 할일을 알아서 한다. 30년의 세월이 구성원을 진짜 피붙이같은 관계로 만들었다.”

슈투트가르트/한귀용 통신원 ariguiyong@hotmail.com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통신원 리포트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