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안달루시아 마리날레다시의 시장인 후안 마누엘 산체스 고르디요(60).
2012년 8월 스페인 안달루시아 마리날레다시의 시장인 후안 마누엘 산체스 고르디요(60)는 마리날레다 노동조합과 함께 세비야의 대형 슈퍼마켓을 ‘습격’했다. 노조원들은 설탕·쌀·식용유·밀가루 등 생필품을 털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다. 스페인 경제를 뒤흔든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저항이었다.
안달루시아 기반의 좌파 정당 ‘노동자 단결을 위한 집단-안달루시아 좌파’(CUT-BAI)를 이끌고 있는 고르디요 시장은 34년 동안 마리날레다의 시장직을 맡아왔다. 누군가는 그를 ‘영웅’이라고 추어올리고 누군가는 ‘독재자’라고 비난한다. 어쨌거나 9번의 재선에서 내리 집권에 성공하는 동안 지지율은 늘 70%를 웃돌았다.
지난 12월15일 마리날레다의 자택에서 만난 고르디요 시장에게 “반대파를 마을에서 추방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벌어진 앞니를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렸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우파는 늘 우리를 사탄이나 위험한 세력으로 몰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가치를 보여주고, 모든 일을 빈틈없이 완벽하게 진행해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는 것, 그것이 중요하죠.”
실제 그의 생활은 시장으로서 누릴 수 있는 사치와는 거리가 있었다. 주민들의 주택과 다르지 않은 공동주택에 살며, 누구든 현관문을 두드리면 그의 아내가 직접 맞이했다. 사실을 확인하긴 어렵지만, 그는 “다른 조합원들과 같은 임금(1200유로·150만원 수준)으로 생활하고 시장 월급의 나머지는 기부한다”고 주장한다. 주민들의 지지 또한 견고했다. 거리에서 만난 주민들은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주저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고르디요 시장은 1952년 마리날레다에서 태어나, 1979년 ‘토지점거운동’을 직접 조직했다. 넓게 펼쳐진 농지를 두고도 주민 대부분이 프랑스·독일 등지에 나가 일해야 하는 현실이 그를 정치에 뛰어들도록 만들었다. 그가 꿈꾼 ‘유토피아’는 단순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들이 있습니다. 일자리, 주거 문제,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권리. 이런 것들을 회복함으로써 다다르게 되는 한 지점이야말로 이상향이죠. ”
그같은 관점에서 볼 때 스페인에 대량 실업을 가져온 2008년 경제위기는 ‘인간다움’의 마지노선마저 뒤흔든 계기였다. “(슈퍼마켓을 습격한 것은) 경제위기가 모든 사람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불복종’의 차원이었죠. 간디의 말처럼, 정의롭지 못한 것에는 복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르디요 시장은 이 작은 마을을 “실재하는 유토피아”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일자리, 주거, 주민집회를 통한 직접민주주의. 세 가지가 마리날레다의 강점으로 꼽히죠.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형태의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주민들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를 꾸려가는 자산이죠. 좌파는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향성입니다.”
토지 점거를 바탕으로 시작된 이 도시의 경험이 다른 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찾고 꿈꾸고, 투쟁하고 현실로 이루어냈습니다. 막연히 동떨어진 꿈이 아니라 실재하는 유토피아로서 마리날레다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마리날레다(스페인)=글·사진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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