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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냉전기 지정학 유산에 매몰된 러-서방

등록 2014-03-03 20:17수정 2014-03-03 22:38

과거 열강 세력다툼의 연장선
EU 앞세운 서방에 맞서 단행한
러의 무력점령은 자충수 될수도
경협 약화·분리주의 촉발 가능성
일촉즉발의 위기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제국주의와 냉전 시대 지정학의 유산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뇌관인 크림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의 갈등은 과거 열강들이 이곳에서 벌인 세력다툼의 연장선이다. 이런 해묵은 지정학에 바탕한 우크라이나 사태의 불길은 러시아와 서방 모두에게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크다.

미국 럿거스대학의 알렉산더 모틸 교수는 <포린 어페어스>에 실은 ‘푸틴의 놀음’이라는 제목의 기고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해 우크라이나를 와해시킨다면, 역설적으로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할 카드를 모두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침체된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서방과 우호관계가 절실한 상황이다. 또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시아 지역은 낙후된 중공업 지역이어서, 러시아가 무력 개입을 통해 이를 떠안게 되면 러시아 경제에 부담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모틸 교수는 짚었다.

무엇보다 크림반도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인 타타르인의 격렬한 분리주의 운동을 촉발해, 러시아 안보의 핵심 지역인 크림반도를 체첸 지역처럼 분리독립 무장투쟁 지역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큰 희생을 치른 타타르인은 반러시아 정서가 강하다. 이렇게 되면 크림반도 주변 흑해와 캅카스 지역의 이슬람계 분리주의 독립세력이 활동 공간을 넓힐 여지가 생긴다.

러시아 경제를 떠받치는 석유와 천연가스 산업에도 타격을 주게 된다.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송유관·가스관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유럽 국가들을 위협할 수 있는 지렛대다. 하지만 사태가 악화하면 오히려 러시아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될 수도 있다. 에너지 수출 의존도가 높은 러시아한테 가스관 폐쇄는 자해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국제 원유값 하락과 미국의 셰일가스 개발 등으로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에 먹구름이 잔뜩 낀 상태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결국 서방이 개입하는 최악의 전쟁 사태로까지 번지게 된다면 소련이 몰락한 때와 비슷한 상황에 러시아가 처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물론 군사적 개입을 선택지에서 일단 배제한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의 태도에 비춰 볼 때 현재로선 둘 다 현실화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시나리오다. 다만 러시아 증시는 3일 개장하자마자 6% 폭락했고, 루블화도 3% 안팎 급락해 유로당 50루블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미국 등 서방은 이번 사태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우선 러시아의 무력 개입을 막을 실질적인 수단이 없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동원한 무력 개입은 미-러의 군사적 충돌로 번질 위험 등 때문에 현재로선 고려할 수 없는 카드다. 미국은 러시아 소치에서 열릴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 불참, 주요 8개국에서 러시아를 축출하는 방안을 꺼내들었지만, 러시아는 꿈쩍도 않고 있다. 미국은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을 무력하게 지켜보다가 러시아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만 경험이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무력 대결이 격화된다면, 우크라이나를 통과해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를 들여오는 유럽 국가들도 재앙을 겪게 된다.

미국과 서방도 최근 사태의 책임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서방이 유럽연합(EU) 가입을 앞세워 러시아의 전통적 앞마당인 우크라이나까지 친서방 국가로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뉼런드 미 국무부 유럽연합 담당 차관보가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와 한 통화에서 야누코비치 정부를 제재하지 않는 유럽연합을 거칠게 욕하는 통화 녹음이 최근 공개된 사실로 드러났듯 미국은 이번 사태에 깊숙이 개입했다. 특히 푸틴 집권 이후 나토가 과거 소련의 자치공화국들까지 회원국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은 러시아와 서방 갈등의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푸틴은 이에 대응해 대서방 강경 정책을 취했고 대러시아 민족주의를 강화했다.

해묵은 대결에 뿌리를 둔 러시아와 서방의 결투는 아직 금융위기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국제사회에 또다른 재앙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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