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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망각과 싸우는 과거사 피해자들 ‘스페인판 이근안’ 법정에 세우다

등록 2014-04-08 20:10수정 2014-04-09 08:50

프랑코 독재정권 고문기술자
피해자들, 추적끝 40년만에 찾아내
과거사 ‘망각’하기로한 사면법 탓에
스페인 아닌 아르헨티나서 재판
“역사의 페이지 그냥 넘길수 없어”
1970년대 스페인의 열혈 운동권 대학생이던 호세 마리아 갈란테는 반정부 시위 도중 여러차례 체포됐다. 그때마다 그가 끌려간 곳은 정보기관의 지하 고문실이었다. 수갑을 찬 채 천정에 매달린 그에게 뭇매를 퍼부은 것은 ‘총잡이’로 불리던 악명높은 고문기술자였다. 그는 시위 대학생들을 고문하고 위협할 때면, 권총을 손가락에 끼고 총잡이마냥 빙빙 돌리는 버릇이 있었단다.

40여년이 흐른 뒤, 갈란테는 지난해부터 옛 운동권 동료들과 ‘총잡이’를 본격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그가 퇴직후 사설 경비업체를 차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가 ‘마라톤광’이라는 사실도 전해들었다. 마라톤 대회에 제출한 서류를 입수해 주소지를 찾아냈다. 프로축구 레알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 부근의 넓은 아파트였다. 갈란테의 집에서 불과 1km 남짓 떨어진 곳이었다.

숨어서 동태를 감시했다. 얼굴을 확인했고, 결국 정체를 밝혀냈다. 프랑코 정권의 경찰에서 경감까지 지낸 안토니오 곤잘레스 파체코였다. <뉴욕타임스>는 7일치에서 “오는 10일 파체코의 법원 출두를 앞두고, 스페인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독재의 악몽이 새삼 되살아 나고 있다”고 전했다.

20세기 스페인의 역사는 파시즘의 광기로 얼룩져있다. 1936~39년 내전으로 공화파를 무참히 짓밟은 군부 독재자 프란체스코 프랑코는 1975년 11월 82살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철권을 휘둘렀다. 특히 내전 직후부터 1940년대까지 약 10년 동안 줄잡아 40만명이 집단수용소와 강제노역장 등지에서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프랑코의 공식 직함은 ‘총통’이었다.

독재가 막을 내린 뒤,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독재정권의 부역자들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했다. 아픈 과거는 묻어 두고 번영의 미래로 나아가자는 주장이 득세했다. 스페인 정치권이 ‘화해’라는 이름으로, 이른바 ‘망각 협정’(엘 팍토 데 올비도)을 맺은 것도 이 때문이다. 1977년 통과된 사면법이 그 핵심이었다. 이로써 내전기간과 프랑코 정권 시절 저질러진 온갖 인권유린 행위는 철저히 가려지게 됐다. 집요한 추적 끝에 파체코를 찾아낸 갈란테가 스페인 대신 아르헨티나 사법부의 문을 두드린 것도 이 때문이다.

국제법의 원칙 가운데 ‘보편적 재판관할권’이란 개념이 있다. 학살, 고문, 전쟁범죄 등 ‘반인도적 범죄’에는 국경도 공소시효도 없다는 주장이다. 아르헨티나 법원은 이를 근거로 지난해 12월 파체코를 기소하고, 스페인 당국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다. 독재가 무너진 지 40여년 만에 파체코가 법원에 출두하게 된 사연이다.

지난 1985년 일찌감치 보편적 재판관할권을 국내법에 적용한 이래, 스페인은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가장 강력하게 대처해 온 나라로 평가를 받는다. 1998년 10월 발타사르 가르손 기소전담 판사가 칠레의 은퇴한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스페인 내부의 과거사 청산 노력은 번번히 ‘사면법’의 위력에 막혀야 했다. 지난 2008년 가르손 판사를 비롯한 열혈 기소전담 판사들을 중심으로 프랑코 정권시절 자행된 인권유린 행위에 대한 수사가 착수되기도 했지만, 극우단체의 반발에 밀려 무위에 그쳤다. 스페인 사법부는 지난 2010년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를 불법도청했다는 이유로 가르손 판사를 해임했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줄기찬 사면법 폐지 요구에도 스페인 당국은 꿈쩍도 않고 있다.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가 이끄는 보수 인민당이 장악한 스페인 의회는 최근 보편적 재판관할권을 대폭 제한하는 쪽으로 관련법 개정 논의를 하고 있다. 지난 2009년에 이어 두번째다.

갈란테와 동료들은 이미 아르헨티나 법원에 출두해 파체코의 고문과 인권유린 행위에 대한 증언을 마쳤다. 그는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화해를 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를 그냥 넘길 순 없다. 일단 역사의 기록을 읽어라도 봐야 할 것 아니냐”고 강조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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