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잉글랜드 통합의 역사
스코틀랜드 주민들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팀이 축구경기를 하면 프랑스를 응원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반잉글랜드 정서가 강하다.
이런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연합왕국을 이루게 된 것은 두 왕국 왕실의 얽힌 혼맥 때문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 후손을 남기지 않은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 사망하던 당일에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잉글랜드식으로는 제임스 1세)를 왕위 계승자로 지목한다.
제임스 6세는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여왕의 외아들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도 주장할 수 있었다. 영화 <천일의 앤> 등으로 여성 편력이 널리 알려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누나가 스코틀랜드 국왕과 혼인한 덕분에 잉글랜드 왕실 혈통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임스 6세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준 엘리자베스 1세는 그의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한 장본인이다. 메리 스튜어트는 생후 9개월 만에 스코틀랜드 왕위를 계승했으나 성인이 된 뒤 내부 권력 다툼에 휘말려 폐위됐다. 이후 잉글랜드로 망명했으나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처형당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의 부인으로 간통 혐의로 처형된 어머니 앤 불린 왕비 때문에 서출 논란이 있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왕실의 적통으로 인정받는 메리 스튜어트가 왕권에 위협적 존재로 보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죽음을 앞두고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을 자신의 후계로 삼은 셈이다.
결국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민족 정서와 상관없이 17세기 초인 1603년 한 군주 아래 두 왕국으로 존재하게 됐다. 스코틀랜드 왕실은 상대적으로 외진 에든버러 대신에 중앙정치 무대로 잉글랜드 런던을 택했다. 그리고 100년여가 흐르고 왕위 계승자들의 스코틀랜드에 대한 애착 감정이 옅어진 뒤 18세기 초인 1707년에 앤 여왕이 두 왕국을 통합하기에 이른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의회는 1999년 노동당 토니 블레어 총리가 자치권을 강화하며 부활시키기까지 300년 가까이 명맥이 끊기게 됐다. 게다가 후손이 없었던 앤 여왕 사후 연합왕국의 왕위 계승권은 독일계 하노버 왕조로 넘어갔다. 그런 탓에 시작은 스코틀랜드 왕실이 잉글랜드 왕실을 통합 계승하는 형식이었지만, 스코틀랜드 주민들은 잉글랜드에 병합된 듯한 피해의식을 가졌다.
정세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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