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화국 행진’에 참가한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11일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나시옹 광장에 세워진 ‘공화국의 승리’ 동상에 올라가 있다. 파리/AFP 연합뉴스
프랑스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샤를리 에브도> 테러의 범인들이 대부분 알제리계 무슬림 젊은이들로 확인되면서 프랑스와 알제리의 오랜 악연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언론인과 경찰 등 12명을 살해하고 사살된 사이드 쿠아시(34)와 셰리프(32) 쿠아시 형제, 그리고 여성 공범으로 도피 중인 하야트 부메디엔(24)은 모두 알제리 출신 이민자 2세들이다. 유대인 식료품 가게에서 인질 4명을 살해하고 사살된 아메드 쿨리발리(32)는 세네갈 출신 이민자 2세다. 알제리와 세네갈 모두 프랑스 식민지였다.
프랑스는 전체 인구 6600만명 중 거의 10%인 650만여명이 무슬림이다. 이 중 약 500만명이 알제리계 주민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빈곤과 실업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스로를 ‘2등 시민’으로 여기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의 중동 전문기자인 로버트 피스크는 지난 9일 “테러의 뿌리는 1954년 알제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 배경은 프랑스가 애써 무시하려는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이라는 게 피스크의 시각이다. 1954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는 민족해방전선(FLN)의 주도로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이후 독립때까지 150만명의 알제리인이 희생됐다. 그는 다수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이번 테러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도 “대다수 언론은 ‘누가’,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면서 ‘왜’라는 물음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았는데, 바로 그 해에 파리에선 부르주아 계급이 절대왕정으로부터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쟁취한 ‘7월 혁명’이 일어났다. 안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혁명’을 하는 동안, 밖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를 침탈하는 제국주의 행태를 보인 셈이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사실상 프랑스의 한 부분으로 여겼다. 알제리가 지중해 바로 건너편 북아프리카에 위치해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의 교두보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무려 132년에 걸친 오랜 식민통치 역사도 한 몫 했다. 프랑스인 거주지는 유럽처럼 개발됐고, 무슬림들의 기독교 개종을 외치며 모스크를 성당으로 바꿔버리기도 했다. 알제리는 오랜 식민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에 동화되면서, 프랑스 제국의회에 대표를 파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엔 많은 알제리 젊은이들이 나치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를 도와 총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통치와 저항세력 탄압은 다른 어느 제국주의 국가 못지 않게 폭력적이고 잔혹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했던 1945년 5월8일, 프랑스군은 알제리에서 자치를 요구하던 시위자들에게 발포해 수만명을 죽였다. 이른바 ‘세티프 학살’이다. 알제리 땅에서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61년엔 프랑스 거주 알제리인들의 비무장시위를 경찰이 유혈진압해 많게는 700명을 학살하고 일부 주검들을 센강에 던져버렸다. 당시 일간 <르몽드>는 “정의가 센강에 던져져 버렸다”고 개탄했다. 프랑스 정부는 2001년에야 이 학살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무슬림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다. 희망을 찾기 어려운 상당수 무슬림 젊은이들이 갈수록 이슬람 극단주의에 관심을 보이는 현실이 바로 프랑스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도전이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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