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는 선방했고, 독일은 체면을 유지했다. 서로 실리와 명분을 주고받은 셈이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외무장관들의 모임인 유로그룹은 24일 그리스가 기존 구제금융 연장의 조건으로 제시한 개혁안 리스트를 승인했다. 유로그룹은 그리스가 제출한 개혁 리스트를 회원국 의회가 승인하는 절차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스는 애초 시한인 23일을 넘겨 개혁 리스트를 제출하는 등 진통을 겪었다. 앞서 그리스는 지난 20일 기존 구제금융을 오는 6월 말까지 4개월간 연장하는 조건으로 기존 구제금융 프로그램인 긴축안 등에 바탕을 둔 자체 개혁안을 제출하기로 국제채권단과 합의했다. 이 합의로 그리스의 급진좌파 시리자 정부는 긴축안 철회 등의 집권 공약을 완전히 포기하는 백기를 든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스가 제출한 개혁안에는 저소득층을 위한 지출, 추가적인 민영화 억제 등이 담겼다. 시리자 정부가 집권 공약을 계속 추진할 여지를 남긴 셈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합의로 그리스는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채권단이 일방적으로 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들이 개혁안을 추진하는 주도권을 회복했다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그리스에 맞서 협상을 주도한 독일은 기존 구제금융 방식과 유럽연합·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이 주축인 채권단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명분을 지켰다. 지난 20일 협상 타결 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그리스 정부는 이 합의안을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데 애를 먹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그리스가 협상에서 완전히 굴복했다는 분위기를 연출하며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명분을 얻었다.
그리스가 제출한 개혁안은 탈세와 부정부패 척결을 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정치권과 결탁해 이권을 챙기는 특권재벌 올리가르히에 대한 과세 확대 등 ‘부자증세’는 시리자 정부의 공약이다. 채권단도 그리스의 세수 확대를 위한 조처에는 적극 찬성하고 있다. 민영화와 관련해서는 이미 진행된 사안은 원상회복하지 않지만, 추가적인 민영화는 재고하기로 했다. 최저임금은 당장 인상하지는 않지만 집단교섭권 도입으로 노동자 입지를 강화할 예정이다. 공공지출이 확대되지 않는 선에서 주거 보장 및 실업자를 위한 의료보험 지원 등 인도적 위기 대응책도 마련한다. 공공분야 노동자들의 추가 임금 삭감을 피하기 위한 개혁, 정부 부처 축소 등을 도입하기로 했다. 연금 개혁으로는 조기은퇴 혜택을 폐지하는 한편 추가적인 연금액 삭감도 중지한다.
그리스 구제금융 채권단의 주축인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도 그리스의 이런 제안들이 “유효한 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피에르 모스코비치 유럽연합 경제 담당 집행위원은 이번 협상으로 목전의 위기를 피했다면서도 “추가적인 토론을 위한 접근책”이라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 쪽은 가장 비판적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 총재는 유로그룹에 보낸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을 포함한 어떤 분야에서 이번 제안서는 그리스 정부가 개혁들을 수행할 의도가 있다는 확실한 보장을 전하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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