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바 (서독출신 정치인·동방정책 설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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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독일 15년] 통일 주역에게 듣는다 ② 에곤 바
동독에 대한 서독의 오만양쪽 주민 불화·갈등 불러
북한 거부적 태도 오래못가
남한 햇볕정책은 올바른 길
보수 언론 비난 집중포화
휘둘리지 않고 밀고 나갔다 배기정= 독일통일 15주년을 맞아 동방정책을 입안한 통일의 설계자로서 독일통일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에곤 바= 나는 대체로 독일의 통일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독일국민도 대부분 분단시대로 되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통일과정에서 많은 잘못이 저질러진 것도 사실이다. 특히 배상보다 반환이 우선한다는 원칙 하에 서독의 원소유자에게 분단이전 동독지역에 지니고 있던 재산을 되돌려주었던 일은 치명적인 잘못이었다. 통일과정에서 생겨난 대부분의 문제는 콜 당시 총리가 서독 마르크화로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자만했던 데 기인한다. 콜은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지금도 우리는 그가 저지른 정치적, 경제적 과오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독일통일은 법적으로는 완결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내적 통일, 정신적 통일은 아직 이루어내지 못했다. 콜 총리 정치적 이용 많은 실수 배기정=통일 15년이 지난 지금도 동서독 주민 간의 갈등이 심각하다. 그 원인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처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에곤 바=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가 동독인들을 잘 몰랐다는 데 있다. 한국과는 달리 우리는 서로를 방문할 수 있었고, 또 동독 사람들은 서독의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시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40년 동안 집단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동독 사람들과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살아온 서독 사람들 사이에는 생각보다 훨씬 큰 차이가 있었다. 특히 서독주민들이 동독에 대해 무관심하고 동독사람들보다 모든 것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태도가 불화와 갈등을 증폭시켰다. 독일통일이 낳은 사회적, 심리적 문제들이 해결되어 동서독 주민이 융화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역사가 원래 그렇듯이 구세대는 사라지고 새로운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가 독일의 미래를 이끌어가게 될 것이다. 배기정=최근 베이징 6자회담이 타결되고, 남북합작으로 개성에 공단을 건설하는 등 지금 남북한 사이의 관계가 접근과 변화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독일 통일과정의 산 증인으로서 한반도의 상황변화를 어떻게 보는가? 에곤 바=독일과 남북한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북한 사람들은 60년 동안 동독보다 더 심한 집단주의적 사회화를 경험했고, 남한도 서독처럼 북한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하지만 나는 햇볕정책 이후 남한의 대북정책이 원칙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한이 북한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면 북한에 무언가를 제공하면서 대화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 북한이 자주 거칠고 거부적인 태도를 취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한반도의 경우 북한 외에도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의 이해가 얽혀 있어 상황이 매우 복잡하다.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은 앞으로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통일이 반드시 당면한 목표여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남북한 모두 서서히 접근하고 변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치적, 군사적 긴장을 최소화하고 평화롭게 서로 다가가야 한다. 배기정=당신의 동방정책은 우리 햇볕정책의 모델이 되었다. 이 정책의 핵심적 모토인 ‘접근을 통한 변화’가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에곤 바=내가 처음 이 말을 한 것은 1963년이었다. 베를린 시장으로 있던 빌리 브란트와 함께 일하고 있을 때인데, 당시 동서독 간의 가장 첨예한 쟁점은 베를린장벽 문제였다. 장벽을 개방하는 일에 연방정부는 물론 주변국들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으므로 우리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조처는 동서베를린 주민들의 상호방문이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동독은 물론이고 소련과 접촉해야만 했다. 이것은 냉전시대의 타부를 깬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접촉에서 쌓은 상호신뢰가 후에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배기정=브란트가 총리가 된 후에 당신은 연방정부에서 동방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때 당신이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은 무엇인가? 에곤 바=1966년 내가 정책기획팀을 맡았을 때, 독일은 통일문제에 관한 한 백지상태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독일의 통일문제가 전적으로 4대 강국의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로서는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우리 팀원들에게 독일을 위해 이 허허벌판에서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고 했다. 우리 구상의 핵심은 유럽의 중심이라는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해서 냉전체제 하의 종속적 위치에서 벗어나자는 데 있었다. 그 후 2년 반 동안 정책을 기획하는데 매진했고, 여기서 동방정책이 생겨났다. 한마디로 동방정책의 기본원칙인 ‘접근을 통한 변화’란 우리 스스로 변화를 일구어내자는 것이었다. “종속적 위치 탈피, 통일구성 핵심” 배기정=최근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6자회담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분단국의 문제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강대국들과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함께 걸려있어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띤다. 당신은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변국과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갔는가? 에곤 바=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검토해서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이다. 동방정책을 추진하기 전에 우리는 독일 문제와 관련하여 동독과 4대 강국은 물론 폴란드, 덴마크, 네덜란드, 체코 등 주변국들의 이해관계에 대해 면밀히 검토했다. 가능한 모든 질문을 제기하고 여기에 답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검토했는데, 그것을 정리한 것만도 2천 쪽에 달했다. 이것을 요약하여 27쪽으로 만들고, 다시 한쪽 반으로 요약한 문서를 회담에 제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1970년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상과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두 건의 문서가 작성되었는데 하나는 동방정책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군비축소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이 1975년 헬싱키 조약과 1989년 동구권 변혁의 밑거름이 되었다. 배기정=냉전 상황에서 협상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양진영 모두에게서 어떻게 신뢰를 얻어낼 수 있었는가? 에곤 바=인간관계가 그렇듯이 국제관계도 상호신뢰의 바탕 위에서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의 경우 브란트가 히틀러와 싸운 반파시스트라는 사실이 소련의 신뢰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기존의 틀을 깨고 동독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려는 우리의 노력도 모스크바의 신뢰를 얻는데 한 몫을 했다. 특히 우리와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 동독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상으로 소련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던 것이 동방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서방측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서방측 대화상대자는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었다. 나는 소련과 대화하기 전에 그에게 우리의 동방정책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고 이해를 구했다. 그는 의혹과 우려를 표명하며 이 문제를 충분히 숙고했는지 물었다. 나는 “헨리,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조언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통보하러 온 것일세. 우리는 이 일을 해내고야 말걸세”라고 말했다. 1970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후, 결국 나는 키신저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정부도 자신들의 계획을 먼저 이야기해준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주변국과 현실 다각도 분석·검토를 배기정=국내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동방정책에 대해 독일 최대의 언론재벌로서 극히 보수적인 반공주의자였던 악셀 슈프링어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였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어떻게 보수언론들의 집중포화 속에서도 동방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는가? 에곤 바=당시 독일에서는 동방정책을 둘러싸고 실로 엄청난 논쟁이 벌어졌다. 조국을 위해 일하려는 사람을 반역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정말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때도 브란트의 용기가 커다란 힘이 되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것이 브란트의 생각이었다. 정치인은 근거 없는 칭찬이나 비난에 휘둘리지 않고 역사를 생각하며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막강하지만 부당한 언론권력에 무릎을 꿇기보다 투쟁의 깃발을 들고 계속 나아갔다. 용기를 가지고 일관성 있게 일을 추진하면 결국 국민들도 그 뜻을 알아준다. 이것이 1972년 선거에서 우리가 압승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인터뷰 정리: 배기정 한국외대 강사(독일 마르부르크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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