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찰스 왕세자가 내각 각료들에게 각종 현안들에 대한 의견을 써 보낸 일명 ‘흑거미 편지’들이 10년간의 소송 끝에 공개됐다. 1952년부터 63년간 영국 역사상 최장기 왕세자로 있는 찰스가 왕위에 오르면 왕실의 정치 중립 원칙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영국 정부는 13일 찰스 왕세자가 토니 블레어 정부 시절이던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블레어 전 총리 등 각료들에게 보낸 흑거미 편지 27통을 공개했다. 영국 정부는 <가디언>이 찰스 왕세자의 흑거미 편지를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소송을 내자 40만파운드(약 6억8627만원) 이상의 소송 비용을 들여가며 공개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최근 법원이 영국 정부에 패소 판결을 내리자 편지를 공개했다. 흑거미 편지라는 이름은 찰스 왕세자가 휘갈겨 쓴 손글씨 모양이 검은 거미처럼 보이는 악필이라는 뜻에서 붙은 별명이다.
찰스 왕세자가 보낸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군용 헬기 교체 문제부터 파타고니아이빨고기(메로) 불법 어획, 오소리 도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찰스 왕세자가 여러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때문에 ‘참견꾼 찰스’라는 별명도 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은 전했다.
찰스 왕세자는 블레어 전 총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낡은 링스 헬기의 교체를 요구하며 “우리 군이 필요한 자원 없이 극단적으로 어려운 일을 수행하도록 요구받고 있다”고 적었다. 또 2004년 환경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남극해 등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파타고니아이빨고기 불법 어획과 마구잡이 조업 등으로 희생되는 알바트로스 문제를 지적하며 “(파타고니아이빨고기) 불법 거래가 중단되기 전까지는 불쌍한 알바트로스에 희망이 적다”고 적었다.
찰스 왕세자가 보낸 편지를 받은 내각 각료들은 왕실의 정치 중립 의무를 알면서도 공손하게 답했다. 블레어 전 총리는 “항상 (왕세자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농업 문제에 관해서 그렇습니다”라고 했고, 찰스 클라크 전 교육부 장관은 “왕실의 가장 겸손하고 충실한 종이 돼 영광”이라고도 했다.
찰스 왕세자는 이번에 공개된 편지뿐 아니라 2010년부터 내각 각료들과 적어도 87차례 모임을 했을 만큼 영국의 각종 현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 왔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찰스 왕세자 쪽은 왕위에 오르면 “진심 어린 개입”을 하겠다는 뜻을 밝힌 적도 있다.
찰스 왕세자의 대변인은 이번 편지가 공개된 데 대해 유감이라며 “왕세자는 대중들이 우려를 제기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노력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노동당 소속 폴 플린 의원은 “(찰스 왕세자가) 지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로비스트가 돼서는 안된다”며 “찰스 왕세자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발언을 해 왕실의 미래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지적했다고 <아에프페> 통신은 전했다.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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