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난민사태 제대로 다루려면 글로벌 자본주의 직시해야”
“아프리카 난민은 강대국들의 경제적 식민주의 매진 결과물”
“인류가 배워야 할 큰 교훈은 좀더 노마드적 삶 준비하는 것”
슬라보예 지젝
2015년 1월부터 9월 현재까지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온 난민은 38만1400명이 넘는다. 2800여명은 목숨을 잃었다. 유엔난민기구(UNHCR) 집계다. UNHCR은 내년까지 85만명의 난민이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유럽의 반응은 두 가지 정도다. “어떻게 유럽이 지중해에 수천명이 수장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있느냐”며 국경을 활짝 열고 연대하자는 이들과 난민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풀도록 하고 “우리 삶의 방식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두고 “둘 모두 더 나쁜 것”이라고 지적하며 “우리 삶의 공동체적인 방식에 진정한 위협은 외국인 난민들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의 작동”이라고 말했다.
지젝은 지난 9일 미국의 진보 시사 월간지 <인 디즈 타임즈>(In These Times)에 ‘우리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직시하지 않고선 유럽의 난민 위기를 다룰 수 없다’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전문 보기) 지젝은 이 글의 축약본과 같은 글을 영국의 격주간지 <런던 리뷰 오브 북스>(London Review of Books)에도 실었다.
지젝은 국경을 개방하자는 의견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좌파’들을 “위선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지젝은 “그들은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며 “왜냐하면, 이런 조처가 유럽의 반이민주의 포퓰리스트(극우주의자)들의 저항에 불을 당길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반이민주의 포퓰리스트들 또한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을 바꾸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며 “왜냐하면, 미국과 서유럽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지젝은 난민 사태의 근본 원인에 대해 “‘ISIS’(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는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발호했다”며 “중앙아프리카에서 진행중인 내전은 민족 간 혐오 분쟁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프랑스와 중국이 이곳에서 석유 자원을 통제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젝은 ‘우리의 잘못’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사례로 ‘콩고민주공화국 분쟁’을 제시했다. 그는 유엔 조사 결과 콩고 분쟁의 주요한 원인은 콜탄, 다이아몬드, 구리, 코발트, 금 등 다섯 가지 주요 광물 자원의 무역과 통제권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민족 간의 분쟁이라는 외관 속에 글로벌 자본주의의 작동을 식별할 수 있다”며 “각 지역의 군벌들은 지역의 광산 자원을 채굴하는 외국의 회사나 법인과 연결되어 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천연자원의 대부분이 노트북이나 휴대전화와 같은 첨단 기술 제품에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젝은 “난민들이 유입되고 있는 시리아와 레바논, 이라크, 리비아, 소말리아, 콩고 등에서 ‘실패한 국가’가 부상하게 된 것은 강대국들이 경제적 식민주의에 매진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다”며 “시리아와 이라크의 수니파들이 연합한 ISIS는 궁극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등 식민지의 주인들에 의해 찢긴 국가들을 다시 합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리아 난민들. 전해리 사진가
지젝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새로운 노예’들이 부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사우디 반도의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 등에 있는 수백만의 이주 노동자들은 기초적인 시민권과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고, 아시아의 저임금 사업장에는 수백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강제 수용소에 있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으며, 콩고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들에는 천연자원 채굴을 위해 대규모 강제 노동이 행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젝은 이와 같은 사례로 2013년 12월1일 이탈리아 프라토의 한 공장 지대에 있는 중국인 소유 의류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판자로 만든 기숙사에 살던 7명의 노동자가 불에 타 사망한 사건을 사례로 들었다. 그는 “수천명의 중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불법 체류하며 하루에 16시간 이상을 노동한다”며 “노예들은 바로 여기, 우리가 사는 곳 안에 있다. 우리가 보지 않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유럽 난민 사태를 계기로 ‘좌파들의 금기’ 하나가 깨질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지젝은 “(중동이나 아프리카 난민들의 유입에 대비해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개별적인 삶의 방식을 보호하는 것이 파시스트나 인종주의 카테고리에 있다는 개념, 우리가 이 개념을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유럽에 반이민주의자들이 번성하는 길을 열어주게 될 것”이라며 “삶의 세부적인 방식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우려에 좌파들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미국의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는 그것의 살아있는 징표”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젝은 “우리 삶의 공동체적인 방식에 진정한 위협은 외국인 이주민들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의 작동”이라며 “미국에서 있었던 지난 수십년 동안의 경제적 변화는 작은 도시들의 공동체적인 삶을 파괴했다”고 지적했다.
지젝은 “인류가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좀 더 노마드적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라면서 네 가지 제안을 하고 글을 마무리했다.
첫째, 유럽은 난민들의 지엄한 생존을 위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야만주의를 타파할 유일한 대안이다.
둘째, 헝가리 또는 슬로바키아 등에서 발생하는 지역적 야만주의를 방지하기 위해 유럽연합 모두를 포괄하는 광대한 관리 네트워크를 통해 난민 유입 사태를 다뤄야 한다. 더불어 난민들은 유럽 당국에 의해 배치된 주거 지역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 지역의 법과 사회적 규범들을 존중해야 한다. 종교적이거나 성적, 인종적인 어떤 형태의 폭력도 관용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나 종교에 어떤 것도 강제할 권리가 없으며, 공동체적 관습을 포기할 모든 개인의 개별적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셋째, 신식민주의적인 모순을 피하기 위한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새로운 방식의 국제적인 해결책도 개발되어야 한다.
넷째, 가장 어렵고 중요한 작업은 난민을 만드는 사회적인 조건을 폐지할 수 있는 급진적인 경제적 변화다. 난민 발생의 궁극적인 원인은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와 지정학적 게임이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그리스 등 기타 유럽 국가의 이민자들이 난민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공산주의를 재발견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장기적으로 우리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