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런던/AP 연합뉴스
영국 노동당은 안개 속에서 탄생했다.
“1900년 2월27일, 화요일 아침의 런던은 언제라도 빗방울로 변할 것 같은 무거운 안개에 잠겨 있었다. 새벽 안개에 지레 위세가 가물해진 가스등 아래로, 파링던가의 메모리얼홀엔 비장한 눈빛의 사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사내들 대부분은 거친 올이 선명한 천 모자를 눌러쓴 검소한 차림이었다. 이들이야말로 불과 20년 후에는 전통의 자유당을 제치고 보수당과 더불어 영국의 또다른 양당정치를 주도해 나갈 노동당, 그 창당을 위한 대회의 주역들이었다.” 고세훈 고려대 교수가 쓴 <영국노동당사>(1999)의 첫 대목이다.
그로부터 115년 뒤인 2015년 노동당은 다시 안개에 휩싸였다. 기존 노동당이 걸어온 이른바 ‘제3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겠다는 후보가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노동당의 진로를 두고 격론이 시작됐다. 제러미 코빈(66)이 주인공이다.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정통 좌파’ 의원으로,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한다. 지난달 12일 당 대표 당선 첫 연설에서 그는 “반격(fightback)이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사회주의 노동당의 가치를 복원하자는 외침이었다. 코빈의 등장으로 노동당, 나아가 영국 정치판에 ‘코빈 신드롬’이 몰아치고 있다.
노동운동가 출신 비주류 불구
압도적 득표로 당 대표에 뽑혀
‘낡은 좌파’ 노동당 격변 예고 중도우파 포괄 ‘제3의 길’ 아닌
긴축반대·인권·비핵화 등
정책분야마다 급진적 비전 제시 다음 총선까지 5년이나 남아
당 안팎의 도전 극복하며
지도력·수권능력 보여줄지 주목 ■ 안개 속에서 출범한 사회주의 정당 런던 새벽길의 안개를 뚫고 창당대회에 모여든 사내들은 페이비언협회, 독립노동당, 사회민주연맹 등 3개의 사회주의 단체와 노동조합 대표들이었다. 노동운동의 주요 분파들이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대의 아래 사상 처음으로 함께한 자리였다. 영국 최초의 노동자 정당인 노동대표위원회는 그렇게 출범했다. 영국에선 1918년이 되어서야 여성(30살 이상)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다. 사회주의 운동에 몸을 던져온 이들이 부르주아 정당 정치 무대에 뛰어들기로 결정할 때만 해도 집권은커녕 제도권 정당으로서의 존속 가능성마저 불확실했다. 온건 좌파에서 급진주의자까지 당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도 너무 넓었다. 오직 선명한 것은 ‘노동자 권력 쟁취’라는 기치와 당가로 애창된 ‘적기가’의 결연한 노랫말뿐이었다. 모든 게 흐릿한 속에서 19세기가 막을 내리고 20세기가 열리고 있었다. 노동대표위원회는 출범 8개월 만인 1900년 10월 총선에 15명의 후보를 내보냈다. 첫 도전이자 중대한 시험이었다. 시작은 초라했다. 노동대표위원회가 얻은 의석은 하원 670석 중 단 2석(득표율 1.8%)뿐이었다. 창당 6년 만인 1906년, 노동대표위원회는 당명을 노동당으로 개칭했다. 그해 총선에선 29석으로 의석수를 늘렸다. 득표율(4.8%)로는 자유당과 보수당에 이어 3위였다. 당의 존재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8년 총선에선 연립보수당에 이어 득표율 2위(20.8%)에 오르며 57석을 차지했다. 그해 전당대회에서 노동당은 사회주의 노선을 분명히 한 당헌을 채택했다. 특히 제4조의 ‘생산수단의 공공소유’ 조항은 유명하다. “육체노동자나 정신노동자가 근로의 결실과 가장 공정한 분배를 보장받기 위해,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공동소유라는 바탕 위에서 모든 산업과 서비스의 관리와 통제를 확보할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한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929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전체 615석 중 287석(득표율 37.1%)을 차지하며 처음으로 집권당이 됐다. 이전까지 영국 정치의 ‘보수-자유’ 양당 구도는 ‘보수-노동’ 양당 구도로 재편됐다. ■ 충격과 환호, 또는 충격과 공포 2015년 9월12일 토요일, 런던은 초가을의 쾌적한 날씨였다. 이날 영국 현대 정치사에 이정표를 세울 사건이 일어났다. 이틀 전 마감된 노동당 대표 선거의 투표를 집계한 결과, 주류 정치권에서 한참 벗어나 있던 ‘아웃사이더’인 제러미 코빈 의원이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코빈의 득표율은 59.5%로, 2위 후보(19%)보다 세 배나 많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코빈은 화려한 학벌, 폼나는 경력, 빛나는 젊음도 없는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런던 태생인 그는 폴리텍을 중퇴하고 재단사노조연맹과 전국공무원노조 등 노조단체에서 일하다 1974년 런던 구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약관 스물다섯이었다. 이어 1983년 총선 때 34살의 젊은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해 중앙정치에 진출한 이래 지금까지 32년째 현역의원을 유지해왔다. 이처럼 오랜 경력의 정치인이 당 내부에선 철저한 비주류이자 소수 반대의견의 대표자였다. 코빈의 당 대표 당선은 지난 6월 후보 등록 때부터 극적인 순간의 연속이었다. 입후보에 필요한 최소 35명의 추천 의원조차 확보하지 못하다가 마감 직전에야 가까스로 등록을 마쳤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당내 토론과 정책 연설이 거듭될수록 그의 저력과 진정성이 힘을 발휘했다. 이웃집 아저씨처럼 소탈하고 겸손하면서도, 자신이 믿는 가치에는 단호함과 일관성을 보였다. 영국인들은 매료됐다. 코빈의 이름을 따 코비나이트(Corbynite)라고 불리는 팬그룹도 생겨났다. 런던의 한 정신과 의사는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7월말 일간 <인디펜던트>에 코빈 지지를 선언하는 커밍아웃 기고를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코빈 지지자들은 어리고, 미숙하며, 순진하다고 말한다. 나는 코빈이 노동당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중년의 고소득 전문직업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코빈 지지자다”라고 썼다. 그는 “많은 노동당 지지자들이 논쟁을 최소화하는 ‘안락한 지역’에 머물러왔지만 솔직한 반론과 그것을 뒷받침할 정책을 제시하는 것은 유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의 상징”이라며 “노동당이 우파 보수당에 대응해 갈수록 우경화한다면 더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동당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당 대표 선거 전 20만명 수준이던 당원이 불과 석달 새 32만명을 넘어섰다. 코빈 신드롬에 가까웠다. ‘늙은 유럽’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영국만큼이나, ‘낡은 좌파’라는 딱지가 붙은 노동당의 극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지지자들에게 코빈의 당선은 ‘충격과 환호’였다. 영국의 대표적 진보언론 <가디언>도 선거 초기만 해도 코빈에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으나, 점차 적극적인 옹호론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주류 기득권 정치인들에게 사회주의 기치를 선명히 내건 코빈의 등장은 좌우를 막론하고 ‘충격과 공포’였다. 코빈은 지난달 당 대표 당선 뒤 처음 참석한 의회 공식행사에서 영국 국가인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가 울려 퍼졌을 때 침묵했다. 지난 8일에는 여왕의 자문그룹인 추밀원 위원 임명식에도 불참했다. 여왕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 맹세를 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공화주의자의 신념에서였다. 논란이 거세지자 노동당 대변인은 향후 코빈 대표가 국가를 부르고 추밀원 회의엔 참석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앞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지난 7일 보수당 콘퍼런스에서 “코빈은 안보를 위협하고, 테러리스트에 공감하며, 영국을 증오하는 이데올로기를 가졌다”며 ‘막말’을 쏟아냈다. 같은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조차 “코빈이 대표가 되면 노동당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 변화의 열기
코빈 대표는 당선 직후 연설에서 “우리 당은 정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그리고 우리가 해온 위대한 전통에 기초해 존립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불평등하지 않아야 합니다. 불공평하지도 않아야 하며, 빈곤이 불가피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변화할 수 있으며, 변화할 것입니다.”
코빈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향후 노동당의 정책노선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그의 나이는 66살이지만, 노동당에는 오랜만에 수혈되는 ‘젊은 피’였다. 그는 “미디어, 그리고 우리 중 상당수도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젊은이들은 기성정치 방식에 신경을 꺼버렸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바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코빈 대표가 그리는 향후 노동당 정책의 윤곽은 지난달 29일 당의 정책 진로를 논의하는 콘퍼런스에서 조금 더 선명해졌다. 코빈은 연설에서 먼저 “나의 압도적 당선은 ‘변화’를 위임받은 것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정치 방식의 변화를 요구한 투표였다”고 평가했다. 그 변화는 “의회에서뿐 아니라 모든 일터와 공동체에서 ‘상명하달’이 아닌 ‘하의상달’과 진정한 토론이 이뤄지는 것”이었다. 이어 그는 긴축 반대, 인권, 시민 안전, 지속가능한 녹색경제, 국가안보, 국제분쟁의 해결, 비핵화, 풀뿌리 참여정치, 교육과 일자리, 국민건강보험 등 방대한 정책 분야에 대한 급진적 비전을 제시했다. 53분에 걸친 이날 연설의 고갱이는 “더 친절한 정치, 더 돌보는 사회”였다.
“나는 어떤 형태든 개인적 폭력을 부정합니다. 사람들을 ‘존중’으로 대하십시오. 당신이 대우받고 싶은 대로 대하십시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토론하십시오. 나는 더 친절한 정치, 더 돌보는 사회를 원합니다. 노동당원이든 아니든, 모든 활동가들에게 말합니다. 인신공격을 그만두십시오. 정치에 가치를 되가져옵시다.”
■ 기대와 견제
노동당은 1970년대까지 보수당과 번갈아 집권하며 영국 정치에 양당체제를 확립했다. 코빈의 하원의원 재임기 중, 앞 절반은 마거릿 대처 총리의 보수당 정권(1980~1997년)이 주도한 신자유주의의 절정기였다. 세계적으로 노동에 대한 자본의 우위가 확고해졌고,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중산층은 몰락해갔다. 영국 노동당도 ‘영국병의 치료’를 앞세운 대처 총리의 강력한 리더십과 거대한 자본주의의 격류에 맥을 못 췄다.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제3의 길’을 주창한 옥스퍼드대 출신의 토니 블레어를 대표로 앞세워 18년 만에 재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앞서 1994년 노동당 대표로 선출된 블레어는 좌파 노선을 포기하고 중도 우파까지 포괄하는 대중정당 노선을 선택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생산·분배·교환 수단의 공동소유’를 명시한 당헌 4조를 폐지한 것이었다. 블레어 전 총리는 노동당 사상 처음으로 3연속 집권을 이끈 뒤 2007년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블레어의 바통을 이어받은 고든 브라운 전 총리는 2010년 총선에서 데이비드 캐머런을 앞세운 보수당에 정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노동당은 지난 5월 총선에서 역시 옥스퍼드대 출신의 젊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에드 밀리밴드를 대표로 내세워 정권 탈환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이제 노동당은 제3의 길을 표방한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지도자들 대신 정통 좌파 정치의 복원을 외치는 노동운동가 정치인을 대표로 선택했다. 그러나 노동당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한편으로, 급진적인 정책 변화에 대한 불안감과 반발도 동시에 커지고 있다.
코빈의 당선으로 시작된 노동당의 격변이 영국 정치의 지각 변화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코빈의 당 대표 선출은 올해 초 총선에서 노동당이 캐머런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에 또다시 패배한 데 따른 지도부 교체였다. 다음 총선까지는 5년이나 남았다. 조기총선 같은 이변이 없는 한, 코빈은 그때까지 당 안팎의 도전을 극복하며 지도력과 수권 능력을 인정받고 노동당 재집권의 토대를 다져야 한다.
코빈은 콘퍼런스 연설의 마지막에 이렇게 역설했다. “불의를 받아들이지 말고 편견에 당당히 맞서십시오. 우리 함께 더 친절한 정치, 더 돌보는 사회를 건설합시다. 우리의 가치, 인민의 가치를 세우는 정치로 돌아갑시다.”
앞으로 5년은 그의 꿈이 야물게 영글지, 도중에 시들고 말지 판가름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압도적 득표로 당 대표에 뽑혀
‘낡은 좌파’ 노동당 격변 예고 중도우파 포괄 ‘제3의 길’ 아닌
긴축반대·인권·비핵화 등
정책분야마다 급진적 비전 제시 다음 총선까지 5년이나 남아
당 안팎의 도전 극복하며
지도력·수권능력 보여줄지 주목 ■ 안개 속에서 출범한 사회주의 정당 런던 새벽길의 안개를 뚫고 창당대회에 모여든 사내들은 페이비언협회, 독립노동당, 사회민주연맹 등 3개의 사회주의 단체와 노동조합 대표들이었다. 노동운동의 주요 분파들이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대의 아래 사상 처음으로 함께한 자리였다. 영국 최초의 노동자 정당인 노동대표위원회는 그렇게 출범했다. 영국에선 1918년이 되어서야 여성(30살 이상)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다. 사회주의 운동에 몸을 던져온 이들이 부르주아 정당 정치 무대에 뛰어들기로 결정할 때만 해도 집권은커녕 제도권 정당으로서의 존속 가능성마저 불확실했다. 온건 좌파에서 급진주의자까지 당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도 너무 넓었다. 오직 선명한 것은 ‘노동자 권력 쟁취’라는 기치와 당가로 애창된 ‘적기가’의 결연한 노랫말뿐이었다. 모든 게 흐릿한 속에서 19세기가 막을 내리고 20세기가 열리고 있었다. 노동대표위원회는 출범 8개월 만인 1900년 10월 총선에 15명의 후보를 내보냈다. 첫 도전이자 중대한 시험이었다. 시작은 초라했다. 노동대표위원회가 얻은 의석은 하원 670석 중 단 2석(득표율 1.8%)뿐이었다. 창당 6년 만인 1906년, 노동대표위원회는 당명을 노동당으로 개칭했다. 그해 총선에선 29석으로 의석수를 늘렸다. 득표율(4.8%)로는 자유당과 보수당에 이어 3위였다. 당의 존재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8년 총선에선 연립보수당에 이어 득표율 2위(20.8%)에 오르며 57석을 차지했다. 그해 전당대회에서 노동당은 사회주의 노선을 분명히 한 당헌을 채택했다. 특히 제4조의 ‘생산수단의 공공소유’ 조항은 유명하다. “육체노동자나 정신노동자가 근로의 결실과 가장 공정한 분배를 보장받기 위해,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공동소유라는 바탕 위에서 모든 산업과 서비스의 관리와 통제를 확보할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한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929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전체 615석 중 287석(득표율 37.1%)을 차지하며 처음으로 집권당이 됐다. 이전까지 영국 정치의 ‘보수-자유’ 양당 구도는 ‘보수-노동’ 양당 구도로 재편됐다. ■ 충격과 환호, 또는 충격과 공포 2015년 9월12일 토요일, 런던은 초가을의 쾌적한 날씨였다. 이날 영국 현대 정치사에 이정표를 세울 사건이 일어났다. 이틀 전 마감된 노동당 대표 선거의 투표를 집계한 결과, 주류 정치권에서 한참 벗어나 있던 ‘아웃사이더’인 제러미 코빈 의원이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코빈의 득표율은 59.5%로, 2위 후보(19%)보다 세 배나 많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코빈은 화려한 학벌, 폼나는 경력, 빛나는 젊음도 없는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런던 태생인 그는 폴리텍을 중퇴하고 재단사노조연맹과 전국공무원노조 등 노조단체에서 일하다 1974년 런던 구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약관 스물다섯이었다. 이어 1983년 총선 때 34살의 젊은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해 중앙정치에 진출한 이래 지금까지 32년째 현역의원을 유지해왔다. 이처럼 오랜 경력의 정치인이 당 내부에선 철저한 비주류이자 소수 반대의견의 대표자였다. 코빈의 당 대표 당선은 지난 6월 후보 등록 때부터 극적인 순간의 연속이었다. 입후보에 필요한 최소 35명의 추천 의원조차 확보하지 못하다가 마감 직전에야 가까스로 등록을 마쳤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당내 토론과 정책 연설이 거듭될수록 그의 저력과 진정성이 힘을 발휘했다. 이웃집 아저씨처럼 소탈하고 겸손하면서도, 자신이 믿는 가치에는 단호함과 일관성을 보였다. 영국인들은 매료됐다. 코빈의 이름을 따 코비나이트(Corbynite)라고 불리는 팬그룹도 생겨났다. 런던의 한 정신과 의사는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7월말 일간 <인디펜던트>에 코빈 지지를 선언하는 커밍아웃 기고를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코빈 지지자들은 어리고, 미숙하며, 순진하다고 말한다. 나는 코빈이 노동당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중년의 고소득 전문직업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코빈 지지자다”라고 썼다. 그는 “많은 노동당 지지자들이 논쟁을 최소화하는 ‘안락한 지역’에 머물러왔지만 솔직한 반론과 그것을 뒷받침할 정책을 제시하는 것은 유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의 상징”이라며 “노동당이 우파 보수당에 대응해 갈수록 우경화한다면 더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동당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당 대표 선거 전 20만명 수준이던 당원이 불과 석달 새 32만명을 넘어섰다. 코빈 신드롬에 가까웠다. ‘늙은 유럽’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영국만큼이나, ‘낡은 좌파’라는 딱지가 붙은 노동당의 극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지지자들에게 코빈의 당선은 ‘충격과 환호’였다. 영국의 대표적 진보언론 <가디언>도 선거 초기만 해도 코빈에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으나, 점차 적극적인 옹호론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주류 기득권 정치인들에게 사회주의 기치를 선명히 내건 코빈의 등장은 좌우를 막론하고 ‘충격과 공포’였다. 코빈은 지난달 당 대표 당선 뒤 처음 참석한 의회 공식행사에서 영국 국가인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가 울려 퍼졌을 때 침묵했다. 지난 8일에는 여왕의 자문그룹인 추밀원 위원 임명식에도 불참했다. 여왕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 맹세를 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공화주의자의 신념에서였다. 논란이 거세지자 노동당 대변인은 향후 코빈 대표가 국가를 부르고 추밀원 회의엔 참석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앞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지난 7일 보수당 콘퍼런스에서 “코빈은 안보를 위협하고, 테러리스트에 공감하며, 영국을 증오하는 이데올로기를 가졌다”며 ‘막말’을 쏟아냈다. 같은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조차 “코빈이 대표가 되면 노동당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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