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숨진 헬무트 슈미트(왼쪽) 전 서독 총리가 1981년 12월11일 동베를린에서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AFP 연합뉴스
유럽 통합의 기초를 닦은 헬무트 슈미트 옛 서독 총리가 10일 96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슈미트는 이날 함부르크 자택에서 최근 급속히 악화된 노환으로 숨졌다고 그가 공동 발행인으로 있는 주간 <디 차이트>의 대변인이 발표했다.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서독 총리로 재직한 슈미트의 대표 공적은 프랑스와의 연대로 유럽에서 독일의 지위를 회복하고 유럽 통합의 기초를 확고히 닦은 것이다.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의 ‘독일의 서방화’,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헬무트 콜의 ‘독일 통일’과 나란히 독일을 부활시킨 업적으로 평가된다.
1918년 함부르크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슈미트는 나치의 청소년단체인 히틀러유겐트에 가입했고 군에 징집됐다. 친할아버지는 유대인이었는데, 그의 집안은 이를 감춰서 살아남았다. 생존을 위해 집안 내력을 감추고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빌어먹을 전쟁’으로 자신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전후 그는 함부르크대 학생 때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1952년 본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사민당 내에서 서독의 재무장 등을 주장하는 보수적이고 실용적인 이단아였다. 그는 함부르크 시정부의 내무장관으로 있던 1962년 대홍수를 수습하면서 명성을 올렸다. 1965년 의회에 돌아온 그는 빌리 브란트 사민당 정권에서 국방장관과 재무장관으로 일했다. 이때 그는 프랑스 쪽의 상대역이던 지스카르 데스탱과 친분을 쌓았다.
1974년 브란트 당시 총리가 측근의 스파이 스캔들로 낙마하자, 그는 총리직을 승계했다. 프랑스에서도 데스탱이 대통령에 올랐다. 두 사람은 프랑스-서독의 지도력 아래 서유럽의 경제통합이라는 비전을 공유했다. 특히 슈미트는 독일은 경제력, 프랑스는 외교력을 제공하는 프랑스-독일 연대를 통해서 유럽에서 독일의 지위를 완전히 회복했다. 이는 두 나라가 주도하는 유럽 통합으로 이어졌다.
슈미트는 오일쇼크의 와중에도 기록적인 흑자를 내는 서독 경제를 이끌었다. 국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중거리 미사일의 서독 배치를 수용했다. 하지만 경제의 확장 정책을 추구하다가 80년대 초부터의 불황에 대비하지 못했다.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수용하기는 했으나, 미국 쪽이 서독 내의 반미사일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과도하게 밀어붙였다고 미국 지도자들과 대립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국내외의 지지를 잃었다.
독선과 오만으로까지 비치기도 한 그의 거침없는 언행은 집권당 내에서부터 반발을 불러, 결국 불신임 투표로 물러나는 최초의 옛 서독 총리가 됐다. 그는 사민당을 실용화시켰으나 보수화로 이어졌고, 이는 1983년 총선에서 사민당의 패배로 귀결됐다.
하지만 슈미트는 퇴임 뒤에도 솔직하고 거침없는 논평과 혜안으로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으로 남았다. 골초인 그는 독일에서 공공장소에서 흡연이 허용된 유일한 인사가 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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