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현지시각) 세월호 유가족들과 힐즈버러 참사 유가족들인 윤경희(왼쪽부터), 배리 데번사이드, 제니 힉스, 유경근씨가 한국에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글이 담긴 플래카드를 들어보이고 있다.
세월호 유족, 영국 힐즈버러 참사 유족 ‘동병상련’ 아픔 나눠
“손이 너무 차갑네요.”
11일(현지시각) 아침 9시, 영국 힐즈버러 참사에서 두 딸을 잃은 제니 힉스(67)는 세월호 유가족 윤경희(40)씨와 만나자 두 손부터 포갰다. 이날 윤씨를 포함한 세월호 유가족 2명은 리버풀에 있는 힐즈버러 참사 유가족회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힐즈버러 유족들은 1989년 4월15일 96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가 있은 뒤, 27년 동안 사건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영국 경찰과 보수언론에 맞선 싸움을 계속했다. 지리한 법적 공방을 거쳐 지난 4월26일, 마침내 영국 워링턴 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경찰 과실 때문에 무고한 관중들이 사망에 이르게 됐다’고 평결했다.
이날 세월호 유족들과의 만남은 진실규명에 이르렀던 과정을 알고 싶어하는 세월호 유족들의 요청에 힐즈버러 유족들이 기꺼이 응하면서 마련됐다. 두 엄마의 대화는 떠난 아이들 이야기로 시작됐다.
“아이가,… 몇 살이었나요?”
“17살, 시연이었어요.”
“제 아이는 19살 사라와 15살 비키였어요.”
또다른 힐즈버러 유가족인 배리 데번사이드(69)도 그때 10대 아들을 잃었다. 아들 크리스토퍼(당시 18살)는 친구 9명과 경기장을 찾았다가 참변을 당했다. 현장에서 시민들이 경기장 광고판을 뜯어 거기에 크리스토퍼의 주검을 얹어 옮겼다. 경찰과 구조인력이 현장에서 제구실을 못하고 우왕좌왕하자 보다 못한 시민들이 나선 것이다. 당시 40대 초반이던 아버지는 60대 후반이 돼 ‘예은이 아버지’ 유경근(48)씨와 마주했다.
“힘드시죠.”
“예, 아버님이 힘든 것처럼, 저희도 힘듭니다.”
“우리도 겪기 전까진 몰랐어요. 참사가 일어나고, 아이를 잃고 나서, 그게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요.”
데번사이드는 이날 약속 시간 훨씬 전부터 사무실을 찾아 세월호 관련 자료들을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그렇게 알게 된 세월호 이야기가 자신들이 겪은 일과 흡사하다고, 그는 여러차례 말했다. “아이들에게 세월호도 안전하지 않았고, 힐즈버러 경기장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축구장 철조망은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설치됐습니다. 경찰은 그 안에서 깔려죽지 않으려고 나오려는 이들을 가로막았습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네요.”
두딸 잃은 힉스, 딸 잃은 윤경희씨
만나자마자 두 손 맞잡고 포옹 “세월호도 힐즈버러도 안전 무방비
경찰은 허둥지둥 탈출하는 이 막아
한국 대통령이 유가족 돕지 않듯
이곳 경찰도 진실 은폐·손가락질” 중년의 엄마 아빠 어느덧 60대 후반
많은 부모들이 재판중 세상 떠나
“공권력과의 싸움 길고 외롭지만
그 길이 정의 세우는 치유의 과정” 그는 사건이 발생한 다음 두 나라 권력이 보인 태도도 유사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유가족들을 돕지 않은 것처럼, 이곳 경찰들도 우리 희생자와 희생자 가족에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은폐하고, 책임을 리버풀 구단 축구 팬들에게 돌리기 위해 모든 술수를 썼습니다.” 데번사이드는 공권력에 맞선 싸움은 매우 길고, 외롭다고 여러차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세월호 유가족을 누가 돕고 있는지, 그 도움이 충분한지 여러차례 묻고 물었다. 이날 현장을 찾은 <비비시>(BBC) 방송의 앤디 길 기자는 개인의견임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27년 동안 유가족들은 무척 외로운 싸움을 했어요. 그 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게, 시간이 흘러 중년이었던 부모가 노년이 되어 세상을 떠난거죠. 많은 이들이 진실이 규명되는 걸 보지도 못한 채 떠나갔습니다.” 27년 전 힐즈버러 참사 때도 현장보도를 했다는 그는 힐즈버러 유가족과 오랜 친구처럼 말을 주고 받았다.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힐즈버러 유족들은 이제 사건의 실체에 조금 더 다가섰다고 밝혔다. 힉스는 또렷이 말했다. “죽음이 우리 아이들 탓이 아니라는 증거가 나왔어요. 우리는 당시 결정권이 있는 사람들의 잘못에 관한 증거를 쥐고 있구요. 이젠 그들의 책임을 물을 차례에요.” 데번사이드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가슴 깊숙이 사랑을 담아 기원합니다. 진실을 밝혀내기를, 정의를 구현하기를. 그 과정은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이들에게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다른 가족들에게도 이 말을 꼭 전해주기 바랍니다.” 리버풀/글·사진 김기태 통신원 limpidkim@gmail.com
11일(현지시각) 세월호 유가족인 ‘시연이 엄마’ 윤경희(오른쪽)씨와 1989년 힐즈버러 참사로 두 딸을 잃은 제니 힉스가 영국 리버풀에 있는 힐즈버러 유가족협회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나 서로 포옹하고 있다. 사진 김기태 통신원
만나자마자 두 손 맞잡고 포옹 “세월호도 힐즈버러도 안전 무방비
경찰은 허둥지둥 탈출하는 이 막아
한국 대통령이 유가족 돕지 않듯
이곳 경찰도 진실 은폐·손가락질” 중년의 엄마 아빠 어느덧 60대 후반
많은 부모들이 재판중 세상 떠나
“공권력과의 싸움 길고 외롭지만
그 길이 정의 세우는 치유의 과정” 그는 사건이 발생한 다음 두 나라 권력이 보인 태도도 유사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유가족들을 돕지 않은 것처럼, 이곳 경찰들도 우리 희생자와 희생자 가족에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은폐하고, 책임을 리버풀 구단 축구 팬들에게 돌리기 위해 모든 술수를 썼습니다.” 데번사이드는 공권력에 맞선 싸움은 매우 길고, 외롭다고 여러차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세월호 유가족을 누가 돕고 있는지, 그 도움이 충분한지 여러차례 묻고 물었다. 이날 현장을 찾은 <비비시>(BBC) 방송의 앤디 길 기자는 개인의견임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27년 동안 유가족들은 무척 외로운 싸움을 했어요. 그 과정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게, 시간이 흘러 중년이었던 부모가 노년이 되어 세상을 떠난거죠. 많은 이들이 진실이 규명되는 걸 보지도 못한 채 떠나갔습니다.” 27년 전 힐즈버러 참사 때도 현장보도를 했다는 그는 힐즈버러 유가족과 오랜 친구처럼 말을 주고 받았다.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힐즈버러 유족들은 이제 사건의 실체에 조금 더 다가섰다고 밝혔다. 힉스는 또렷이 말했다. “죽음이 우리 아이들 탓이 아니라는 증거가 나왔어요. 우리는 당시 결정권이 있는 사람들의 잘못에 관한 증거를 쥐고 있구요. 이젠 그들의 책임을 물을 차례에요.” 데번사이드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가슴 깊숙이 사랑을 담아 기원합니다. 진실을 밝혀내기를, 정의를 구현하기를. 그 과정은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이들에게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다른 가족들에게도 이 말을 꼭 전해주기 바랍니다.” 리버풀/글·사진 김기태 통신원 limpidkim@gmail.com
힐즈버러 참사
1989년 4월15일 영국 중부 지역 셰필드의 힐즈버러 경기장에서 열린 리버풀과 노팅엄포리스트 간의 축구 경기에 관중들이 대거 모여들면서 96명이 압사한 사건. 당시 경찰은 사고 원인을 피해자들의 과실로 몰고 갔고, 영국 최대 일간 <더 선>을 비롯한 일부 보수신문들은 훌리건들의 잘못을 탓했다. 지난 27년에 걸친 유가족들의 끈질긴 진상규명 덕분에 경찰이 조직적으로 증거를 조작하고 은폐한 정황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9년 구성된 힐즈버러 독립조사단은 현장에서 경찰이 군중의 흐름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고, 초기 응급조치의 실패로 적어도 41명의 사망을 초래했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사고가 발생한 초기에 현장에 도착한 44대의 앰뷸런스 가운데 오직 2대만이 경기장 안에 들어가 응급환자를 실어날랐다. 경찰의 불필요한 통제 때문이었다. 지난 4월26일 열린 재판에서 배심원단은 관중의 사망은 경찰의 과실 때문이라고 평결했다. 이 사건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참사에 책임을 지고 형사처벌을 받은 이는 아직 한 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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