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남동쪽 교외 비트리쉬르센 거리에 있는 프랑스 대선 선거 벽보. 가장 논쟁적인 후보인 마린 르펜 사진의 눈 부분에 줄이 그어져 있다.
프랑스 파리와 교외 지역에 붙은 대통령 선거 벽보에서 극우 정당 국민전선(FN) 후보 마린 르펜(48)의 얼굴은 종종 훼손돼 있다. 눈에 줄이 그어졌거나 아예 찢긴 것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만큼 유권자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후보인 탓이다.
19일(현지시각) 파리 남동쪽 교외 비트리쉬르센 거리에서 만난 20살 남성 페르난도(무직)는 충성도가 높은 것으로 유명한 르펜 지지층 가운데 한 명이다. “르펜은 나태한 정치권을 바꿀 유일한 사람이다. 실업률이 높고 이민자가 너무 많다. 난민·이민자들이 경제적 원조를 우리 국가로부터 너무 많이 받는다. 르펜의 이민 제한, 유럽연합(EU) 탈퇴 공약을 지지한다.”
르펜은 청년 실업률이 25% 안팎에 육박하는 현실에 분노한 청년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18~24살 유권자층의 르펜 지지율은 35~40%에 이른다.
쉰 살의 페인트공 사이드를 만난 곳은 파리 서부 교외 낭테르에 있는 국민전선 건물 앞이었다. 그는 울타리 안에 경호인력이 여러 명 배치된 국민전선 건물의 삼엄한 경비를 바라보며 “르펜은 무슬림이나 다문화주의에 적대적이다. 난 장뤼크 멜랑숑을 찍겠다”고 말했다. 그는 급진 좌파 후보 멜랑숑(65)이 주당 노동시간을 35시간에서 32시간으로 줄이되 최저임금을 올리겠다고 한 공약을 언급하며 “멜랑숑이 당선되면 내 월급이 좀 더 오르지 않겠냐”고 기대했다. 그는 “부유한 사람이 더 큰 부를 챙기며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프랑스 자본주의 구조를 반대한다. 부자 중심 자본주의에 맞선 멜랑숑을 지지한다”고 했다. 멜랑숑은 40만유로(약 4억8천만원) 이상의 소득구간에 대해선 90%의 세금을 매기겠다는 파격적 공약과 함께 자국의 이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유럽연합(EU) 조약 재협상을 주장하고 있다. 에펠탑 근처에서 만난 레스토랑 종업원 실비(28)는 멜랑숑을 지지한다면서 “멜랑숑의 도전은 기성 정치권에 맞선, 평화적인 혁명 시도”라고 말했다.
23일의 대선 1차투표를 앞두고 프랑스에선 좌우의 양극단에 선 후보들이 동시에 결선투표(5월7일) 진출을 바라보는 유례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프랑스 현지 여론조사 결과들을 종합하면, 극우 후보 르펜과 중도를 표방한 국민운동 조직 ‘앙마르슈’(전진)의 에마뉘엘 마크롱(39)이 지지율 22~25%대로 양강을 형성하고, 급진 좌파 멜랑숑과 보수 공화당의 프랑수아 피용(63)이 18~19%대로 추격하고 있다. 프랑스 대선은 1차에서 50%를 넘는 득표자가 없으면 1·2위가 결선을 치른다. 멜랑숑이 상승세를 이어가면 르펜과 결선에서 만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번 대선의 특징은 그간 프랑스 정치권을 양분해온 보수 공화당과 진보 사회당이 뚜렷한 강세를 보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기성 정치의 위기다. 그러는 사이 좌·우의 더 극단으로 치우친 멜랑숑과 르펜, 그리고 그 중간지대를 공략하는 중도(마크롱) 후보가 기존 정치 세력을 대체하며 지지세를 넓혔다.
이런 현상은 실업률이 10%가 넘는 경제 침체에다, 사회적 위기에 대해 해결책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복합된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반이슬람·반유럽연합 등 대결·고립주의를 표방하는 르펜에 대한 우려가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겠다는 그의 ‘프랑스 우선주의’가 대중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소득 안정을 위한 기본소득제를 제안한 집권 사회당 후보보다 부자에게 높은 소득세를 걷겠다고 공약한 멜랑숑의 인기가 더 높은 것에서도 집권·기득권 세력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드러난다. 파리 8대학 사회정치연구센터의 정치학자인 디미트리 쿠랑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관용과 절제로 대표되던 프랑스 사회와 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커지면서 더 파격적이고 극단적인 주장에 공감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극우·극좌 후보가 결선에 동시에 올라가거나, 극우 르펜의 당선으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현 정부에서 경제장관을 지낸 뒤 중도를 내세우며 새로운 국민운동 조직을 만든 마크롱이 여론조사에서 1·2위를 다투고 있어서다. 유럽연합 탈퇴를 내건 르펜의 집권을 막자는 여론이 마크롱에게 호의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부동층이 여전히 35% 안팎인 것으로 알려져, 이들의 표심이 1차 투표에 중대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07년과 2012년 프랑스 대선의 투표율은 80%를 넘겼지만, 11명이 출마한 이번에는 그보다 투표율이 낮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빵집에서 일하는 스테파네 자비(37)는 “현재의 정치인들은 이기적이란 인상이 강하다. 지금은 투표도 하기 싫은데 마지막 티브이 토론(20일) 등을 보며 고민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파리 낭테르/글·사진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