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2.19 18:28
수정 : 2018.02.19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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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전 강원도 평창 슬라이딩센터에서 윤성빈이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3차 레이스 결승선에 도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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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윤종-서영우도 ‘라트비아 썰매’ 사용
대당 1억여원…BMW·페라리 등 기술 각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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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전 강원도 평창 슬라이딩센터에서 윤성빈이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3차 레이스 결승선에 도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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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가 농구는 그 지역에서 제일 잘할지도 모른다 . 유로비전 (노래 경연대회 )에서는 에스토니아가 우승할지도 모른다 . 그러나
봅슬레이라면 라트비아에 필적할 나라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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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의 한 기자가 지난 2002년에 쓴 기사의 일부다. ‘발트 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의 하나로만 알고 있는 라트비아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는 내용이다.
올림픽이 시작되자 ‘라트비아’란 단어가 자주 귀에 들린다. 지난 18일 봅슬레이 남자 2인승 ‘원윤종-서영우’조 경기 중계 중에 ‘라트비아’라는 단어가 거듭 등장했다. 해설자는 “원윤종 서영우 조도 한
국 썰매 대신 라트비아산 썰매를 선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16일 윤성빈 선수가 스켈레톤에서 금메달을 딸 때도 ‘라트비아’가 자주 등장했다. 윤성빈이 혜성처럼 등장하기 직전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스켈레톤 월드컵을 휩쓸었던
‘독재자’ 마르틴스 두쿠르스는 라트비아의 스켈레톤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두쿠르스는 러시아와 영국 선수에게 밀려 결국 5위에 그쳤지만, 2차 주행과 3차 주행에선 연달아 2위를 차지하며 윤성빈을 압박했다.
■ 장비가 정말 중요한 썰매 경기
썰매 종목에선 선수의 기량과 함께 썰매를 만드는 기술력이 매우 중요하다. 두쿠르스가 윤성빈에게 왕관을 물려주기 전까지 세계를 호령할 수 있었던 데는 장비의 역할이 컸다. 윤성빈 역시 지금의 썰매를 손에 넣기 전까지는 세계 70위권을 맴돌았다. 〈
매거진S〉의 인터뷰를 보면, 초기에 세계랭킹 70위권을 맴돌던 윤성빈은 영국인 장비 코치 리처드 브롬리를 영입하고 그가 운영하는 브롬리사의 썰매로 바꾸면서 2014-2015시즌에 세계랭킹 5위로 성적이 수직상승 했다. 당시 대표팀 이용 감독은 “이전까지 보급형 소형차를 타던 윤성빈이 슈퍼카 브랜드의 스포츠카로 바꾼 셈”이라고 밝혔다. 브롬리 코치와 함께 ‘브롬리 사’를 운영하는 형제 크리스티안 브롬리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라이벌로 자신의 썰매를 직접 디자인하는 두쿠르스를 꼽기도 했다. 기술력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의 라이벌이 된 것이다.
라트비아의 썰매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대당 가격이 1억원이 넘을 정도로 고가인 봅슬레이는 첨단 기술의 각축장이다. BMW, 페라리, 맥라렌 등의 고성능 완성차 제조사들이 기술 경쟁을 벌인다. 탄소섬유를 이용해 무게를 적정 수준까지 낮추고,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음새 없이 일체형으로 설계한다. 기술력이 없는 나라는 기술 강국의 썰매를 타지 못해 야속해 하기도 한다. 한국스포츠개발원(KISS) 민석기 선임연구원은 “독일이나 미국·영국 등의 자동차 회사들이 만든 썰매를 구입 자체가 힘들다. 국가 산하의 연구원에서 개발해 특허를 낸 뒤 아예 판매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현대차가 봅슬레이 개발에 뛰어든 것도 이같은 이유”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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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의 스켈레톤 선수 마르틴스 두쿠르스.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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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는 이같은 ‘고래들’ 사이에서 우뚝 선 또 하나의 강자다.
캐나다 봅슬레이 국가대표팀은 2016년 유로테크사 제품에서 라트비아산 ‘봅슬레이 기술센터(BTC)의 썰매로 갈아탔다. 당시 대표팀 조종사인 저스틴 크립스는
〈밴쿠버선〉(Vancouver sun)과의 인터뷰에서 “당신이 살 수 있는 가장 빠른 썰매”라며 “(팔지 않기 때문에) 독일이나 미국의 썰매를 살 수는 없다. BTC의 썰매가 차이를 만들어 줄 것이다”라고 밝혔다.
지난 6일 자메이카 여자 봅슬레이 대표팀은 “일본 썰매가 라트비아 썰매보다 느리다”며 일본의 중소 기술업체들이 후원해 온 썰매 대신 라트비아 썰매를 타기로 했다. 우리나라 선수들 역시 “직선 구간에서 강점을 보이는 현대차 썰매보다 올림픽에서 승부를 가를 9번 코스에서 선수들이 안정적인 기록을 내는 BTC 썰매가 더 적합하다”며 최종적으로 라트비아의 BTC에서 만든 썰매를 택했다. 민 연구원은 “라트비아가 이런 각축장에서 썰매 강국으로 살아남은 건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고 밝혔다.
■ 라트비아 알릴 유일한 수단 ‘봅슬레이’
그렇다면 라트비아는 어쩌다 이런 썰매 기술 강국이 되었을까?
가디언은 1991년까지 구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던 라트비아인들에게 봅슬레이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알리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고 분석했다. 가디언은 “소련이 지배하던 시절 겨울 올림픽에서 라트비아 출신의 야니스 키푸르스 등이 메달을 딴 후에야 세계인들은 처음으로 라트비아가 소비에트 연방과는 다른 국가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라트비아 출신인 키푸르스(Janis Kipurs)는 1988년 캘거리 겨울올림픽에 소비에트 연방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라트비아의 봅슬레이 기술 발전은 소련의 자금력이 있어 가능했다. 당시 소련은 스포츠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겨울올림픽에 큰돈을 쏟던 시기였는데, 그 영향으로 라트비아에 자금 지원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라트비아의 ‘봅슬레이 스켈레톤 협회’는 누리집에서 “당시 겨울 올림픽에서 독일에 뒤진 이후 소련의 공산당이 메달 수확 종목으로 봅슬레이를 집중적으로 육성했는데, 봅슬레이와 관련한 대부분 인력이 라트비아 출신”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덕에 현재 라트비아에선 봅슬레이를 포함한 썰매 종목이 큰 인기를 끌고 있고 ‘봅슬레이 체험’은 주력 관광상품이기도 하다. 1991년 독립 후 라트비아는 스켈레톤에서 은 2개, 루지에서 은1 동3, 봅슬레이에서 은 1개로 총 4개의 은메달과 3개의 동메달을 땄다.
박세회 기자 sehoi.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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