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극우·민족주의 물결이 ‘반유대주의’로 표출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며 미국대사관을 이전하기로 한 뒤, 유대인들을 대대로 괴롭혀온 정서가 강력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 대상 범죄가 이어지자, 밖에서는 전통 복식을 하고 다니지 말라는 권고까지 나왔다.
요제프 슈스터 독일 유대인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24일 <베를린 공영 라디오>에 출연해 “대도시에서 공개적으로 키파를 쓰지 말라. 상징을 명백히 드러내는 게 원칙적으로 (반유대주의에 대항하는) 옳은 방법이지만, 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는 또 현재 유럽의 민족주의 물결은 “반유대주의뿐 아니라 인종주의, 외국인 혐오증와 관련돼 있다. 명확히 정지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키파는 유대인 남성이 하늘에 머리를 보이지 않는다는 취지로 일상적으로 착용하는 반구 형태의 모자다.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대표적 성지인 예루살렘 통곡의 벽 등지에서 반드시 키파를 써야 한다.
슈스터 위원장의 발언은 이튿날 예정된 ‘베를린은 키파를 착용한다’라는 이름의 행진을 앞두고 나왔다. 이 행사는 최근 베를린 한복판에서 발생한 유대인 혐오 범죄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기획됐다. 지난 17일 키파를 쓴 유대인 남성 2명이 길거리에서 ‘묻지마 폭행’을 당했다. 현장 영상이 공개되고, 경찰이 수사에 들어가자 이틀 후 범인이 자수했다. 범인은 19살의 팔레스타인계 시리아 난민이었다.
불온한 움직임은 그뿐만이 아니다. 20일 독일 남부 콘스탄츠의 한 극장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생일을 기념해 나치의 상징을 가져오는 관객에게 무료 입장 혜택을 제공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이달 초에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조롱하는 가사를 쓴 래퍼 2명이 독일 최고 권위 음악상인 에코상을 수상했다.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 오브 이스라엘>은 베를린의 학교들에서 반유대주의적 모욕과 위협, 유대인 따돌림이 벌어지고 있으며, 일부는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기도 했다고 밝혔다. 유대인 차별을 감시하는 ‘반유대주의 정보·연구센터’는 지난해 베를린에서만 공격 18건, 위협 23건 등 947건의 반유대주의 사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도 비슷한 기류가 감지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반유대주의에 맞서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면서 대응에 나섰다. 메르켈 총리는 22일 이스라엘 <채널 10>에 출연해 “불행히도 반유대주의를 안고 독일에 온 많은 아랍 출신 난민이 있다는 현상에 직면했다”고 우려했다. 유대인 사회는 시리아 내전 등으로 유럽에 아랍계 난민이 대거 유입되며 반유대주의 흐름이 본격화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유럽에서 전통적인 유대인 핍박은 ‘유럽 본토인’들이 저질러온 반면, 최근 반유대주의 행동은 팔레스타인 문제 등에 불만을 품은 중동 출신들이 주로 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런 가운데 다음달 14일 이스라엘 건국 70돌을 앞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는 충돌과 긴장감이 증폭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인 이방카와 그의 유대인 남편 재러드 쿠슈너, 역시 유대인인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 등 대규모 사절단이 미국대사관 이전 행사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랍 국가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 이튿날을 ‘대재앙의 날’로 여기는 팔레스타인에선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지난달 30일부터 반이스라엘 시위가 이어지는 중이다. 현재까지 40여명이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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