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4.29 17:08
수정 : 2018.04.3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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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수만명이 28일 스페인 나바라주 팔플로나 거리에서 2016년 발생한 집단 성폭행 사건 판결에 항의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팜플로나/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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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무리 사건’, 성폭행 아닌 ‘성적학대’ 결론
검찰 22년 구형했지만 법원은 징역 9년 선고
사흘째 전국적 시위…온라인 운동 불붙을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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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수만명이 28일 스페인 나바라주 팔플로나 거리에서 2016년 발생한 집단 성폭행 사건 판결에 항의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팜플로나/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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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을 대표하는 소몰이 축제인 ‘산 페르민 축제’에서 2년 전 발생한 집단 성폭행 사건에 대한 판결이 나오자 시민들이 ‘솜방망이’라며 대규모 항의 시위에 나섰다. 법원이 26일 이른바 ‘늑대 무리 사건’을 성폭행(강간)이 아닌 ‘성적 학대’로 보고 가해자 5명에게 각각 징역 9년을 선고하자 수만명이 사흘째 거리로 나왔다. 스페인 정부는 성범죄 분류 체계를 재검토하겠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사법 개혁과 여성의 권리 강화를 외치는 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될 조짐이다.
<아에프페>(AFP) 통신은 28일 사건 발생지인 나바라주 팜플로나와 수도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알리칸테 등 주요 도시에서 시민 수천~수만명이 모여 ‘늑대무리 사건’에 대한 판결에 항의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학대가 아니라 성폭행이다”라고 적은 손팻말을 들고 “이것이 가부장제가 말하는 정의냐”라며 반발했다. 팜플로나에서는 3만여명이 산 페르민 축제 때 소몰이 행사가 열리는 도로를 내달리면서 분개했다. 마드리드 법무부 청사 앞에 모인 시민들은 의회까지 행진하고, 국방부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였다.
2016년 7월 호세 앙헬 프렌나 등 20대 후반 남성 5명은 축제에서 만난 18살 여성을 아파트 건물 안 구석으로 몰아 옷을 벗기고 무방비 상태에서 성폭행했다. 일부는 이 장면을 휴대폰으로 촬영했고, 여성의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빼내 달아났다. 이들은 에스엔에스(SNS) ‘왓츠앱’ 채팅방으로 성폭행 장면을 공유하며 시시덕거리기까지 했다. 이때 채팅방 이름이 ‘늑대 무리’여서 이 사건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피해자 보호를 이유로 지난 5개월간 비공개로 재판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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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28일 스페인 나바라주 팜플로나의 광장에서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팜플로나/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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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쪽 변호인은 경찰의 사건 보고서를 토대로 피해자가 사건 당시 수동적으로 행동했고 눈을 감고 있었다며, 이런 태도가 ‘동의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피해자의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라며 징역 22년을 구형했다. 그러나 법원은 성폭행이 아닌 성적 학대만을 인정했다. 성폭행을 입증하려면 폭행이나 협박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나바라주 검찰은 항소 의사를 밝혔다.
판결 소식에 스페인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분노의 대상은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스페인의 사회 시스템으로도 옮겨붙었다. 온라인에선 “말하라”는 뜻의 스페인어 ‘#꾸엔딸로’(#cuentalo), ‘#아닌 건 아닌 거야’(#no es no) 등의 구호가 붙은 게시물이 잇따라 올라왔다. 해당 판사들의 자격을 박탈하자는 온라인 청원에는 120만명 이상이 서명했다.
마리아 돌로레스 데 코스페달 국방장관은 “한 사람으로서, 시민으로서, 여성으로서 판결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느 여성도 편치 않은 야만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판사 출신인 마누엘라 카르메나 마드리드 시장도 트위터에 “정의에 대한 여성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했다”고 적었고, 산탄데르은행 최고경영자 아나 보틴은 “이 판결이 여성의 안전을 후퇴시켰다”고 반발했다. 가르멜회 수녀들은 페이스북에 “우리는 저녁에 밖에 나가지 않고, 파티에 가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고, 순결하겠다는 자유로운 서약을 했다. 같은 이유로 자유롭게 (우리와) 반대의 행동을 하는 모든 여성이 가진 심판, 성폭행, 위협, 살해, 모욕당하지 않을 권리를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시위에 동참한 시민 이리아 그란달은 <시엔엔>(CNN)에 “스페인엔 여전히 여성혐오증과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행태가 남아있다. 그러나 이제 여성들은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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