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8.28 16:45
수정 : 2018.08.28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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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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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묵과한 교황은 사임하라”
보수파 비가노 대주교 공개 요구
미 성직자들 맞장구 목소리 높여
성추행을 동성애 이슈로 몰아가
이혼·재혼자 영성체 참여 문제 등
유연한 교황에 보수파들 못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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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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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쿠데타다.”
마시모 파졸리 미국 빌라노바대 신학 교수는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가 교황의 사임을 요구한 것에 대해 28일 <시엔엔>(CNN)에 이렇게 말했다.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는 종종 암투가 있어왔지만, 고위 성직자가 공공연히 교황의 퇴위를 요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를 두고 ‘쿠데타’나 ‘내전’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다.
비가노 대주교의 성명은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가정대회에 참여하려고 아일랜드를 방문한 시점에 맞춰 보수 가톨릭 매체들을 통해 공개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어도어 매캐릭 추기경의 비행을 알면서도 진작 조처하지 않고,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내렸던 징계를 풀었다는 주장이다. 2000~2006년 미국 워싱턴 대교구를 이끈 매캐릭 추기경은 성가대 남자 아동과 신학생을 성추행한 사실이 공개돼 지난달 추기경단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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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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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노 대주교의 11쪽짜리 성명은 매우 신랄하다. 그는 “교황은 자신이 선언한 무관용 원칙에 따라 사임해 매캐릭의 학대 사실을 은폐한 모든 추기경들과 주교들에게 훌륭한 선례를 남겨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가톨릭 교회가 “동성애 네트워크”에 감염됐다고 비난했다. 교황청은 교황이 매캐릭 추기경의 성폭력을 못 본 체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비가노 대주교의 공격 배경을 놓고 교황과의 ‘구원’이 거론된다. 그는 2011~2015년 미국 주재 교황청대사를 지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2015년 미국 방문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비가노 대주교는 교황이 켄터키주 공무원 킴 데이비스를 접견하도록 주선했다. 데이비스는 법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동성결혼 커플에게 혼인증명서를 발급하지 않아 구류에 처해지면서 보수주의의 영웅으로 떠오른 인물이다. 데이비스는 “교황이 나의 용기에 사의를 표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내 ‘문화 전쟁’에 끼지 말자는 입장을 지닌 교황으로선 황당한 사건이었다. 비가노 대주교는 그 뒤 나이가 찼다는 이유로 대사직에서 물러났다. 이를 두고 교황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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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이 26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세계가정대회 행사에서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더블린/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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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동성애를 둘러싼 가톨릭 내 보-혁 대결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미국의 보수 성직자들이 비가노 대주교에게 맞장구를 치며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텍사스주의 조지프 스트릭랜드 주교는 신도들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비가노 대주교 등의 입장은) 아직 주장에 그치지만, 당신들의 목자로서 내가 그 진실성을 입증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세계 곳곳에서 교회를 흔드는 사제 성폭력 사건의 배후에 있는 ‘동성애 문화’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교황 퇴위를 주장한 비가노 대주교는 미국 연방대법원 청사 앞에서 동성 결혼 반대 집회에 참여하며 ‘전투적 가톨릭 보수주의’를 실천해왔다. 교황이 이혼·재혼자의 영성체 참여에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등 엄격한 교리와 거리를 둬온 것도 보수파를 자극했다.
하지만 반대 쪽에서는 이런 식의 동성애 혐오는 이미 비상식적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맞서고 있다. 이들은 동성애냐 이성애냐가 아니라, 사제들이 권력을 이용해 신도들을 괴롭힌 게 문제의 본질이라는 입장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애 문제에 절충적 태도를 취해 왔다. 그는 동성애자로 의심되면 사제로 받아들이지 말자면서도, 동성애자 사제에 관한 질문에 “내가 누구를 심판하겠나”라고 말했다.
보수파의 공세에 교황은 무대응 전략을 펴고 있다. 26일 사임 요구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비가노 대주교의) 성명을 주의 깊게 읽고 스스로 판단하라. 난 한마디도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교황청 안팎에서는 10월 세계 주교 회의 등에서도 보수파의 공세가 이어질 것이라 교황이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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