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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05 16:08 수정 : 2018.11.05 23:21

9세기 바이킹들의 갤리선을 복원한 모습. 출처 Flickr

웁살라대 연구원 새로운 결론 논문
8세기 선박 방수용 타르 대량생산
연안 노략질 넘어 원거리항해 교역

9세기 바이킹들의 갤리선을 복원한 모습. 출처 Flickr
8~11세기 유럽을 주름잡았던 바이킹의 성공 비결은 방수재 타르의 대량생산 산업화 덕분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선박의 목재 접합 틈새로 바닷물이 새어드는 걸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방수재를 양산함으로써 스칸디나비아 연안 해역 뿐 아니라 대서양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한 대규모 선단을 운용할 수 있었다는 것.

스웨덴 웁살라대학의 고고학·고대사 박사 과정 연구원인 안드레아스 헨니우스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학술 저널 <앤티쿼티>(Antiquity, 고대) 최신호에 이런 내용을 뼈대로 한 논문을 발표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4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헨니우스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타르 제조 설비들에서 제조된 방수재의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바이킹이 유럽의 다른 지역들을 공략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를 찾았다고 주장했다. 이 설비들은 일회에 최대 300리터까지 방수 타르를 생산할 수 있었는데, 이는 매우 많은 선박들에 한꺼번에 방수재를 칠할 수 있는 양이라는 것. 헤니우스는 “소규모로 시작된 타르 제조가 ‘바이킹 시대’에 대량생산으로 발전하면서 (제조창들이) 해안가에서 울창한 삼림지대 외곽으로 이전했다”며 “이런 변화는 해양문화의 발달로 타르 수요가 늘어난 데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타르는 가마에 소나무 목재를 가득 채운 뒤 그 위에 토탄을 덮고 불을 지펴 만든다. 2000년대 초 스웨덴에서 발견된 소규모 가마들은 서기 100~4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들인데, 이후 도로 건설 과정에서 발견된 대형 가마들의 제작 연대는 그보다 훨씬 뒤인 680~900년대로 바이킹의 부흥기와 일치한다. 이런 대형 가마들은 처음엔 숯을 굽는 용도로 여겨졌지만, 헨니우스는 자신의 연구조사를 토대로 이 가마들이 숯이 아닌 방수재 타르 제조 설비라는 결론을 얻었다.

중세 북유럽의 바이킹들이 만들어 타던 롱 갤리선의 모습. 출처 노르웨이 오슬로 바이킹선박박물관 누리집
바이킹은 고대에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거주한 게르만족 혈통의 노르드(Nord)인을 가리킨다. 바이킹은 통상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약탈을 일삼은 전사 이미지가 강하다. 793년 바이킹이 잉글랜드 북부 린디스판 수도원을 무참하게 노략질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불가침의 성소로 여겨지던 수도원까지 공격당한 것은 충격과 공포였다. ‘요크의 앨퀸’으로 불리는 북부 잉글랜드 노섬브리아의 수도승은 당시의 충격을 이렇게 기록했다. “세인트 커스버트 성당을 보라, 신의 사제들의 피가 난자하게 흩뿌려진 곳…브리튼 왕국에서 이교도들의 먹잇감으로 가장 취약한 장소.”

바이킹족은 그러나 이미 로마제국 시절에 금세공품, 뿔잔, 철제투구, 청동저울 등을 만들어 팔았을 만큼 손재주가 뛰어났다. 앞선 선박 건조술과 항행술로 남쪽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중서 유럽 및 지중해권역과 교역했을 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까지 활보하며 문명 교류에도 한몫을 했다. 잉글랜드의 요르비크(요크), 우크라이나의 키이우(키예프), 아일랜드의 더블린 등은 당시 바이킹이 건설한 도시들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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