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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01 15:33 수정 : 2019.05.01 16:30

레오폴트 3세.

빌헬미나 여왕, 레오폴트 3세 구명 내각에 지시
나치 상층부 망명 돕는 조건 바티칸 중재 추진

레오폴트 3세.
네덜란드 여왕이 2차대전 말기에 벨기에 왕을 구명하려고 나치 상층부의 망명을 돕는 거래를 추진한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가디언>은 최근 발견된 에일코 판클레펀스 전 네덜란드 외무장관의 일기를 통해 이런 사실이 밝혀졌다고 30일 보도했다. 일기에는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이 1945년 3월 레오폴트 3세의 석방과 나치 상층부의 유럽 밖으로의 탈출을 맞바꾸는 거래를 바티칸을 통해 추진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빌헬미나 여왕이 지시를 한 시점은 나치 독일 패망 2개월 전이다. 레오폴트 3세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벨기에 브뤼셀에서 오스트리아 스트로블로 이송돼 나치 친위대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빌헬미나 여왕은 나치가 아들을 해칠지 모른다는 레오폴트 3세 모친의 호소에 따라 이런 지시를 했다고 한다. 레오폴트 3세 부부는 나치가 항복한 1945년 5월7일 스트로블에 진주한 미군에게 발견됐다.

빌헬미나.
하지만 레오폴트 3세는 해방된 벨기에로 바로 돌아가지 못했다. 나치의 피해자로 보지 않는 시각 때문이었다. 그는 1940년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했을 때 내각이 망명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했는데도 도망자로 보이기는 싫다는 이유를 대며 브뤼셀에 남아 항복의 길을 택했다. 히틀러를 만나 자주권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등은 그를 배신자라거나 나치의 협력자라고 비난했다. 벨기에에서는 1944년 해방 뒤 그의 동생을 섭정으로 세웠다.

스위스 제네바 부근에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하던 레오폴트 3세는 1950년 그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한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하고, 프랑스어권인 남부 왈롱 지방은 분리독립 움직임으로 반발을 표출했다. 결국 아들 보두앵에게 양위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 여왕의 벨기에 왕 구명 시도는 혈연으로 묶인 경우가 많은 데다 군주제 유지라는 공통의 목표를 추구해온 유럽 왕실들의 상부상조 관계를 보여준다. 또 빌헬미나 여왕이 은밀한 거래의 중개자로 지목한 바티칸에 대한 의구심을 키우는 측면도 있다. 바티칸은 종전 직후 나치 전범들이 남미 등지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는 논란에 시달려왔다. 바티칸은 조직적으로 전범들을 빼돌리지 않았다는 입장이지만, 가톨릭교회 쪽이 연루됐음을 보여주는 사실과 주장은 꾸준히 제시됐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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