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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8 05:00 수정 : 2019.11.08 09:04

베를린 훔볼트 대학 사회학과 슈테펜 마우 교수.

[베를린장벽 붕괴 30년]
슈테펜 마우 홈볼트대 교수 인터뷰

자유와 복지 엄청난 이득이지만
서독인들이 부동산·상위직 휩쓸어

동서독 격차 줄어들 것 기대했지만
제도 변화가 사회변화 담보 못해
풀뿌리 민주화 역량 못 살린 점
동독 기업 과격한 민영화 등 문제

정치·사회 결정 참여할 길 열어야
극우 득세 막고 통합 희망 키울 것

베를린 훔볼트 대학 사회학과 슈테펜 마우 교수.

오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꼭 30년째 되는 날이다. 환희와 희망이 장벽을 뒤덮었던 그날,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사회학과 슈테펜 마우(49) 교수는 동독 군대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동독 지역에서의 극우세력 확장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제도적 변화가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동독 지역 인재와 기업 양성이 부족했다”고 짚었다. 최근 출간된 저서 <뤼텐 클라인―동독 전환사회에서 살기>로 독일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를 지난 1일(현지시각) 오후 대학 연구실에서 만났다. 독일 북동쪽 항구도시 로스토크에 있는 ‘뤼텐 클라인’ 지역에서 자란 마우 교수는 지역 주민과 직접 얘기하며 사회구조와 정서의 변화, 정치적 불만족과 소외의 이유를 다각도로 연구해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30년 전 그날을 어떻게 경험했는가?

“슈베린 지역의 동독 군대(NVA)에서 병사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춥고 비가 오고 있었다. 그때 작은 라디오로 장벽이 무너졌다는 서독 뉴스를 들었다. 듣고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때 해방의 기분과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영원할 것 같았던 체제가 해체돼 갑자기 자유롭게 말하고 소통하며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1990년 1월에 동독의 의무복무 장병들은 집으로 돌려보내지고 직업군인은 서독 군에 편입됐다. 하루아침에 동독 군대는 적군이었던 서독 군대에 소속됐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동독 젊은이들 사이에 정치 토론이 활발하게 일어났다고 했다. 함께 고민하던 그런 사회로 발전했는가?

“당시엔 통일까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표현의 자유,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화두로 동독 사회의 개혁을 원했다. 그런데 갑자기 ‘통일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그 통일은 서로 다른 사회가 대등하게 합쳐지는 게 아니라, 동독이 서독으로 가입하는 식이었다. 서독에서 통용되던 모든 법과 제도가 동독에 적용됐다. 우리가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잘려나가 버린 것이다. 나를 포함해 동독인 대부분에겐 절망적인 체험이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복지를 원하긴 했지만 그런 식은 아니었다.”

―독일 통일로 긍정적 효과도 있지 않았나?

“자유를 얻었다는 점에서는 엄청난 이득이었다. 동독인 대다수는 통일이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복지를 얻었다. 또한 ‘1989년 이후로 삶이 향상되었는가’란 여론조사를 하면 동독인 대부분이 ‘삶의 질이 높아졌다. 통일은 우리에게 이득이었다’고 답변한다.”

―그렇다면 통일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통일의 형식이다. 동독인들은 대량실업 사태와 탈산업화로 경제적으로 강등당하는 과정을 겪었고, 그들의 삶의 형식이 문화적으로 평가절하당했기 때문이다. 동독 특유의 정서를 형성했던 경험은 서독인에게는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까지도 동독 지역은 ‘서민 사회’에 머물러 있다. 인구 구성에서 상위 그룹의 비율은 매우 낮고, 소득과 재산이 적은 그룹의 비율이 높다. 물론 통일 뒤 동독 사회의 소득 수준은 높아졌지만 아직 서독 수준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동독 지역에는 프랑크푸르트증시(DAX)에 상장된 기업은 거의 없고 소규모의 가족기업이 대부분이다. 또한 민영화된 동독 기업의 대부분도, 동독 시내의 부동산도, 브란덴부르크주의 아름다운 숲과 호수도 서독인 소유로 돌아갔다.

게다가 서독에서 동독으로의 엘리트 이전이 있었다. 서독인 3만~4만명(대부분은 남성)이 은행장, 법원장, 병원장 등으로 사회기반시설의 재건을 도우러 동독으로 왔다. 이로써 동독의 엘리트들은 밀려났다. 오늘날까지 동독 지역 상위 직급 자리의 4분의 3을 서독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동독 지역에서 자생한 엘리트층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교훈’이 한국에 던지는 시사점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최근 한국 동료와 ‘한국은 독일의 통일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했다. 통일이 되면 사회기반시설에 재정적 투자만을 할 게 아니라 현지에 있는 사람들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함께 참여할 기회를 주고, 그들이 좋은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치적·사회적 결정에 모두가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독일에서 보듯 장기간에 걸친 좌절감의 영향, 엘리트 비판, 체제 비판이 그들 사이에 퍼질 것이다. 지금 독일에서 극우 포퓰리즘을 표방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동독 지역에서 힘을 얻고 있는 이유다.”

―동독의 극우 현상은 얼마나 심각한가?

“매우 심각하다. 이를 되돌리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동독엔 시민사회가 거의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일 전 동독의 시민·공공사회는 회사나 국가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 두 개가 모두 붕괴되고 여기에 공간이 생겼는데 그 빈자리를 극우주의자들이 메우면서 일부는 뿌리내리고 자리를 잡았다. 서독의 기존 정당들은 동독의 당원 수가 매우 적어 동독 현지에서의 정당 정치 활동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내가 연구했던 동독 지역(뤼텐 클라인)의 경우 인구 4만명 중 사민당 당원 수가 21명이었다. 이렇게 되면 각 정당이 현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그러니 서독의 극우주의자들이 동독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리로 옮겨가 극우 운동을 했다.”

―뤼텐 클라인 연구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90년대에는 통합을 통해 장기적으로 동·서독 차이가 희미해질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런 기대가 맞지 않는다는 게 증명됐다. 즉 제도적 변화가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는 자신만의 동력을 가지고 있어서 제도적 발전과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저서에서는 동독의 인구 상태도 문제로 보고 있다.

“지난 30년간 200만명 이상의 인구가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했다. 주로 젊은이들이 동독 지역을 떠났기 때문에 그 지역의 노령화가 문제다. 또 하나 큰 문제는 남성 성비가 더 높다는 거다.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주한 인구의 3분의 2가 여성이다. 그렇다 보니 파트너를 구하지 못한 남성이 많이 남는다. 남성성의 과도화는 동독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남성 친구들 간의 유대, 강한 공격성, 강한 극우 성향으로 이어진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아쉬웠던 점은?

“사회 기반으로서의 동독 인재들을 양성했어야 했다. 가령 동독의 젊은이들이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장학금 재단을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동·서독이 함께, 동독인의 이익까지 고려한 독일 헌법에 대해 토론했을 수도 있었을 거다. 동독 기업들에 대해 너무 과격한 민영화도 문제였다. 당시 동독인들이 직접 이런 기업들을 사들여 운영할 수 있게 국가에서 지원하는 재정 수단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다. 또 1989년 가을 동독에서 일었던 민주적 역동성을 이용해 당시 동독의 풀뿌리 민주화 운동을 정치권으로 더 끌어들여 왔어야 했다. 내가 사는 프렌츨라워 베르크 지역 벽에 ‘1989에 대한 향수’라는 낙서가 적힌 것을 본 적이 있다. 1989년부터 1990년까지 1년간은 국가권력은 없었고, 동독인 모두 해방과 기쁨을 누리던 기간이었다. 동독 지역에서 ‘독자와의 만남’ 여행을 다니며 이런 정치적 요구가 남아 있음을 보았다. 이들과 만나 느낀 점은 모두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그곳 사람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면, 민주주의를 해치는 당을 찍는 일은 적어질 것이다.”

베를린/한주연 통신원 jhanbielefel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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