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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0 09:05 수정 : 2019.12.06 16:51

[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⑨난민운동가 제니퍼를 따라 떠나는 베를린 여행

크로이츠베르크에서 가이드 투어를 운영하고 있는 제니퍼와 참가자 모습. 채혜원 제공.
여행자는 물론 베를리너가 가장 사랑하는 ‘크로이츠베르크’는 다양한 이민자가 사는 다문화 동네이자 수많은 비영리조직과 시민단체의 주요 활동지다. 케냐에서 온 난민 인권운동가이자 국제여성공간(IWS) 동료인 제니퍼는 이곳에서 특별한 가이드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베를린 난민 운동이 시작된 발자취를 따라가는 ‘제니퍼 투어’는 1970년대부터 저항운동의 중심이었던 ‘오라니엔플라츠’에서 시작한다. 2012년 겨울, 이 광장에서는 바이에른 지역의 난민 캠프에서 한 난민이 자살한 사건을 규탄하며 전국 난민들이 모여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광장을 지나 도착한 곳은 난민여성운동 역사가 시작된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학교’였다. 당시 난민 운동가들은 비어 있던 이 학교 건물을 점령해 거주하기 시작했고, 이곳에 처음으로 ‘여성 공간’이 만들어졌다. 난민 운동은 남성 중심적이었고,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에서 여성은 배제됐다.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이 목소리를 내고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쿠르드족 여성 활동가인 ‘라우라’는 남성 중심으로 진행되는 회의에 참석해 발언했다.

“우리는 학교의 한 층을 여성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듭니다.” 그러자 남성들이 답했다. “글쎄요, 그 공간이 필요한지 논의를 해봅시다.” 라우라는 단호하게 답했다. “우리는 지금 질문하는 게 아닙니다. 여성 공간을 만든다고 발표하고 있는 겁니다.”

이후 이들은 학교 2층의 한 영역을 여성 생활공간과 독일어 수업 및 여러 워크숍이 열리는 학습 공간, 응급처치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 여성 공간은 학교에서 난민들이 강제 퇴거당한 2014년 여름까지 지속됐다. 퇴거 이후 여성 공간 구성원들은 계속 일을 이어나갈 공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영화관과 카페, 어린이집, 호스텔 등으로 이뤄진 ‘문화공동체’, 상담소와 스포츠센터, 작업장 등 다양한 여성 공간으로 구성된 ‘여성센터’ 등 여러 단체의 도움으로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이주·난민 여성이 활동에 동참하게 되었고, 여성 공간은 지금 내가 일하는 국제여성공간으로 발전했다.

게르하르트 하우트만 학교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여성 공간 모습(2013년). 국제여성공간 제공.
제니퍼의 가이드 투어는 학교와 문화공동체, 국제여성공간 사무실을 지나 페미니즘 관련 행사가 자주 열리는 ‘이벤트홀’, 난민들이 운영하는 가게와 인디 라디오방송국 등도 찾아간다. 투어는 난민 운동의 가부장적 구조에 대항해왔고, 지금도 크로이츠베르크 곳곳에서 투쟁을 벌이는 페미니스트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마무리된다. 폴란드 슈체친 대학에서 난민 관련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 아가타는 “폴란드에서는 독일만큼 난민 운동이 활발하지 않아 현장을 접할 수 있는 가이드 투어에 참여하게 됐다”며 “난민 출신 인권·여성운동가인 제니퍼에게 난민 역사를 새롭게 배웠다”고 말했다.

제니퍼의 가이드 투어는 크베어슈타트아인(querstadtein)이라는 비영리조직이 운영한다. 이 조직은 난민과 이주자, 거리생활자에게 듣는 여러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여기서 가이드로 활동하는 여성은 제니퍼와 시리아에서 온 라샤 둘뿐이다. 시리아에서 도시계획기사로 일했던 라샤는 건축과 거리에 담긴 난민과 이주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여러 건물 사이를 걸으며 보이지 않는 장벽과 그 장벽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에 대한 라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제니퍼와 나는 그의 가이드 투어를 신청하기로 했다.

4년 가까이 살았지만 수많은 이주자와 난민이 살고 있는 베를린의 하루하루는 이렇듯 늘 새롭다. 그래서 여전히 일상이 아닌 여행지 같은 베를린을, 오늘도 걷는다. 제니퍼와 라샤 외에도 도시 곳곳에 새겨지고 있는 여성 역사를 들으며.

▶채혜원: <여성신문> <우먼타임스> 등에서 취재기자로,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전세계 페미니스트와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chaelee.p@gmail.com

지난 노동절 때 크로이츠베르크 거리를 메운 시민들 모습. 채혜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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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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